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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허구의 사실이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사례가 왕왕 존재합니다. 중국의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삼국지(三國志)>라 불리는 나관중(羅貫中)이 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란 소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의 자료에 기초하여 탁월한 필치로 흥미진진하게 쓰여진 이 소설은, 작가의 관점에 의해 조조(曹操)는 간웅(奸雄)으로, 유비(劉備)덕장(德將)으로, 그리고 제갈량(諸葛亮)이란 인물은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주인공으로 각색되어 등장합니다.
이 소설에서도 아마 가장 드라마틱한 부분은 바로 ‘적벽대전(赤壁大戰)’이라 칭해지는, 208년 조조(曹操)가 손권(孫權)및 유비(劉備)의 연합군과 싸웠던 전투가 아닌가 합니다. 오늘은 이 적벽대전(赤壁大戰)의 허(虛)와 실(實)을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에 기술되어 있는 사실들을 가지고 살펴보려 합니다.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에는 적벽(赤壁)의 전투를 기록한 글이 모두 5군데 등장합니다. <위서(魏書). 무제기(武帝紀)>, <촉서(蜀書). 선주전(先主傳)>, <촉서(蜀書). 제갈량전(諸葛亮傳)>, <오서(吳書). 오주전(吳主傳)>, <오서(吳書). 주유전(周瑜傳)>등이 그것인데, 이중 4군데의 글에서 기록하고 있는 바는 당시 조조군(曹操軍)에 역질(疫疾)이 돌았다고 기술하고 있어, 이 부분은 사실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듯 합니다. 남방지역의 찌는 듯한 습기찬 기후에 역질까지 돌았으니, 북방출신의 조조군(曹操軍)에게는 매우 힘든 싸움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 다음 적벽전(赤壁戰)에 빼놓을 수 없는 화공(火攻)부분인데, 화공(火攻)이 언급되어 있는 글은 모두 3군데로, <촉서(蜀書). 선주전(先主傳)>, <오서(吳書). 오주전(吳主傳)>, <오서(吳書). 주유전(周瑜傳)>이 그것인데, 먼저 <촉서(蜀書). 선주전(先主傳)>에는 ‘손권은 선주(先主: 유비)와 힘을 합쳐 조공(曹公)과 적벽에서 싸워 크게 이긴 후 그 배를 불태웠다’라고 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화공(火攻)에 의해 승리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승리한 후 배를 불태웠다’라고 다르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오서(吳書). 오주전(吳主傳)>에는 또 다르게 기록되어 있기를, ‘주유(周瑜)와 정보(程普)가 유비와 함께 진격하였는데 적벽에서 조조군을 만나 그들을 크게 격파하니, 조공(曹公)이 남은 함선을 불태우고 병사를 이끌고 퇴각했다.’라고 하고 있어, 함선에 불을 지른 주체가 조조군(曹操軍)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는 퇴각시, 군량미나 함선등 적군에게 보탬이 될 소지가 있는 것은 소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조조군은 퇴각함에 따라 이와같은 protocol에 따라 행동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마지막 문제의 기술이 바로 <오서(吳書). 주유전(周瑜傳)>으로, 여기서는 주유의 부하 황개(黃蓋)가 계략을 꾸며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한후 짚을 가득 실은 배를 보내 불을 질러 승리를 이끌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나관중이 자신의 소설에서 극화(劇化)한 소재를 찾은 유일한 사료(史料)이기도 합니다. 이상을 종합하여 보면, 전쟁에서 승리한 오(吳)나라의 정사(正史)에서도 ‘조조군에 역질이 돌았다’, 그리고 ‘조조군이 퇴각하면서 함선을 불태웠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역사적 사실은 남방풍토병에 시달리던 조조군이 전투에서 패하여 퇴각하면서 스스로 함선에 불을 지른 것일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적벽전(赤壁戰)의 화공(火攻)부분은 상당부분 싱빙성이 떨어진다 라고 밖에 결론짓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다음 시간에 소개드릴, <위조공작서여손권(爲曹公作書與孫權): 적벽전(赤壁戰)후 조조의 명에 의해 작성된 손권에게 보내는 편지글. 건안칠자의 한사람인 완우(阮瑀)가 작성>에도 적벽전(赤壁戰)에 관한 동일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아래에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적벽전(赤壁戰)의 기록들을 발췌 소개드립니다.
1. <위서(魏書). 무제기(武帝紀)>
‘조공(曹公)은 적벽에 도착해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했다. 이때 역병이 유행해 관리와 병사가 많이 죽었다. 그래서 조공(曹公)은 군대를 되돌리고, 유비는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公至赤壁, 與備戰, 不利. 於是大疫, 吏士多死者, 乃引軍還. 備遂有荊州, 江南諸郡.)’
2. <촉서(蜀書). 선주전(先主傳)>
‘손권은 주유(周瑜)· 정보(程普) 등 수군 수만을 보내 선주(先主: 유비)와 힘을 합쳐 조공(曹公)과 적벽에서 싸워 크게 이겨 그 배를 불태웠다. 선주(先主)는 오군(吳軍)과 함께 수륙 양면으로 진격하여 남군(南郡)까지 추격하였는데, 당시 역질(疫疾)이 돌아 북군(北軍)이 많이 죽으니 조공(曹公)이 퇴각했다. (權遣周瑜、程普等水軍數萬,與先主並力與曹公戰於赤壁,大破之,焚其舟船。先主與吳軍水陸並進,追到南郡,時又疾疫,北軍多死,曹公引歸。)’
3. <오서(吳書). 오주전(吳主傳)>
‘주유(周瑜)와 정보(程普)가 좌·우독이 되어 각각 1만 명을 거느리고 유비와 함께 진격하였는데 적벽에서 조조군을 만나 그들을 크게 격파했다. 조공(曹公)이 남은 함선을 불태우고 병사를 이끌고 퇴각했는데, 병사들 가운데 굶어죽거나 병에 걸려 죽은자가 태반을 넘었다. (瑜、普為左右督,各領萬人,與備俱近,遇於赤壁,大破曹公軍。公燒其餘船引退,士卒饑疫,死者大半。)’
4. <촉서(蜀書). 제갈량전(諸葛亮傳)>
‘제갈량전(諸葛亮)이 손권에게 유세하길, “예주(豫州-유비)의 군이 비록 장판(長阪)에서 패했으나 지금 돌아온 병사와 관우의 수군(水軍)이 정예병 1만명이고, 유기(劉琦)의 강하(江夏)의 병사 또한 최소한 만명입니다. 조조의 군사는 멀리 와서 피폐해졌고, 제가 듣기로 유비 공을 추격해 경기병(輕騎兵)으로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왔다 하니, 이는 이른바 ‘강노(强弩: 쇠뇌)도 끝에 이르러서는 얇은 노나라의 명주 천도 뚫을 수 없다’(强弩之末, 勢不能穿魯縞)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때문에 <손자병법>에서도 이를 꺼려 ‘필히 앞장선 장군(上將軍)도 피로에 지쳐 넘어진다’(必蹶上將軍)고 했습니다. 게다가 북방 사람들은 물싸움에 익숙치 않고 또한 조조에 귀부한 형주민은 병세(兵勢)에 핍박당한 것이지 마음으로 복종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장군께서 맹장(猛將)에 명해 수만 군사를 파견해 유비 공과 협력하여 힘을 모으면 필히 조조군을 격파할 수 있습니다. 조조군이 격파되면 틀림없이 북쪽으로 돌아갈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형(荊), 오(吳)의 세력이 강해져 정족(鼎足-솥발)의 형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패의 계기는 금일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자 손권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주유· 정보· 노숙 등 수군 삼만을 보내, 제갈량을 따라 선주를 뵙고 힘을 합해 조공(曹公)에 대항하였다. 조공(曹公)은 적벽에서 패해 군대를 이끌고 업(鄴: 위나라 수도)으로 돌아갔다.
(亮曰:「豫州軍雖敗於長阪,今戰士還者及關羽水軍精甲萬人,劉琦合江夏戰士亦不下萬人。曹操之眾,遠來疲弊,聞追豫州,輕騎一日一夜行三百餘里,此所謂『彊弩之末,勢不能穿魯縞』者也。故兵法忌之,曰『必蹶上將軍』。且北方之人,不習水戰﹔又荊州之民附操者,逼兵勢耳,非心服也。今將軍誠能命猛將統兵數萬,與豫州協規同力,破操軍必矣。操軍破,必北還,如此則荊、吳之勢彊,鼎足之形成矣。成敗之機,在於今日。」權大悅,即遣周瑜、程普、魯肅等水軍三萬,隨亮詣先主,并力拒曹公。曹公敗於赤壁,引軍歸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