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과 한글보다는 기모노와 영어에 환장하겠다는 얼빠진 나라
영재들만 입학하여 공부하는 카이스트에서 자주 학생들이 투신자살하여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원인을 추적하다 보니 학생들 피 말리는 무한경쟁교육에서 비롯된 징벌형 등록금제와 영어몰입강의 때문인 것으로 드러 났다. 서남표 총장이 국회 청문회에 출석하여 국회의원들의 질타를 받으면서 사퇴요구를 했는데, 서남표 총장은 책임은 지겠으나 사퇴는 하지 않겠다며 버티었고, 국회 청문회 후에는 서남표 총장일행이 선방을 잘했다며 웃음까지 보여 네티즌들의 분노와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학생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고도 선방운운하며 퇴진하지 않겠다는 모습이 과연 교육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으며, 공약들을 백지화하여 국민을 우롱하고 지역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이명박의 모습과도 같다.
문제는 카이스트 학생들이 투표를 했는데 과반수 이상이 서남표 총장의 개혁은 실패하지 않았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점이다. 즉 서남표 총장을 신뢰했다는 의미다. 그러한 결정은 자신의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데 카이스트의 내부 정화보다는 카이스트의 명예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으로 밖에 생각이 안 든다. 학생들이 더 죽어 나가야 그 때 정신이 차릴까나 모를 일이다. 지금의 대학생들의 의식수준이 저러하니 비싼 등록금내고 학교를 다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더 죽어 나가고 등록금이 더 인상되야 정신이 버쩍 들지 않을까? 그래서 국민의 정치의식이 변해야 정치인들도 잘 선택할 수 있고 정치도 발전할 수 있으며, 학생들의 의식이 변해야 대학도 민주화되고, 평신도들의 의식이 변해야 종교집단의 성직자들도 변할 수 있으며, 국민과 학생과 평신도를 우롱하거나 탄압하거나 죽음으로 내 몰거나 수탈하는 정치인.교육자.성직자들은 책임을 물어 퇴출시켜야 하는 것이다.
신라호텔이 유명 한복디자이너 출입을 금지시켰다 하여 네티즌들이 분노하며 신라호텔에 항의를 했고, 신라호텔측은 한복차림은 걸려 넘어져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위험을 제거하가 위해 금지시켰다며 공개사과를 했다. 그런데, 한복출입금지이유가 말이 되지 않는다. 걸려 넘어져 다칠 사람도 거의 없을 거니와 넘어져 다쳐도 당사자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럴듯한 변명이고 실은 한복은 거부하고 기모노복장은 환영하겠다는 한국비하조치가 아니였나 싶다. 고대로 올라가면 백제여성들의 의상을 변형시킨 기모노도 신라호텔의 한복출입금지 이유대로라면 위험한 복장이기 때문이다.네티즌들이 더욱 분노한 건 지금까지 기모노 복장을 한 일본여성들은 신라호텔 행사에 출입한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때문이였다. 이명박에 이어서 일본장교 박정희 딸이며 친일역사논리를 펴는 뉴라이트의 길이 한나라당과 다르지 않다던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해서 그런지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며 교과서에 게재하고 국내 친일파들은 본색을 드러 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국민 모두가 좌시힐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신라의 후예 청나라 황실 역사서 [만주원류고]가 기록한 신라의 기원과 영토
100년전 지나대륙을 지배한 청나라 황족의 성씨는 신라를 잊지 말고 사랑하자는 '애신각라'다. [欽定滿洲源流考(흠정만주원류고]는 신라 마의태자의 아들 김행의 후손들이 세운 김(금)나라를 계승한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다. 금(김)나라 황실의 역사서는 [금사]다. [금사]에는 김나라를 세운 개국시조 아골타의 선조는 한반도에서 만주로 이주한 신라출신의 고려인으로 불교에서 개명한 법명 김함보(김행)로 기록되어 있다. 전북 부안 김씨는 신라 마의태자 후손들인데, 부안 김씨족보에는 마의태자 아들 중에 한 사람이 고려를 떠나 만주로 이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금사]에 기록된 아골타의 선조 김함보는 마의태자 아들이 틀림없다 할 것이다.
[사료]欽定滿洲源流考卷四(흠정만주원류고 권4) : 신라의 기원
部族 부족-新羅(一作斯盧 一作新盧雞林附) 신라(사로 또는 신로 계림부로 쓴다)
三國(삼국시대) : 三國志魏書 辰韓(另條見前)十二國 有斯盧國 通典 新羅國 魏時新盧國 其先本辰韓 辰韓始有六國 稍分為十二 新羅其一也 魏将毌丘儉 討髙麗破之 髙麗王奔沃沮 其後復歸故國 留者遂為新羅焉
『삼국지 위서三國志魏書』에는 “진한辰韓 (다른 조에서 이미 보았음) 12국에 사로국이 있다.”고 되어 있다. 『통전通典』에는 “신라국은 위魏라때 신로국新盧國으로 기록되었고, 그 선조는 본래 진한辰韓 이다.진한辰韓 은 처음에 6국이었는데 점차 나누어져서 12국이 되었다. 신라는 그 중의 하나이다.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쳐서 이기자 고구려왕은 옥저沃沮로 달아 났다. 그 뒤에 옛나라로 돌아 왔으나 (옥저에) 남은 (고구려) 사람들이 신라를 세웠다.(1)”고 되어 있다.
通考 新羅國 在百濟東南 五百餘里 (亦在 髙麗東南 兼有 漢時 樂浪郡之地)初曰新盧 或曰新羅 東濵大海 魏毌丘儉破髙麗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留者遂為新羅 故其人雜有華夏 髙麗百濟之屬 兼有沃沮 不耐韓濊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入新羅 遂王其國
『통고通考』에는 “신라국은 백제 동남 5백여리에 있다.(또한 고구려 동남에 있고, 한나라 때의 낙랑군(2) 땅을 차지하고 있다), 초기에 신로 또는 신라로 불렀다. 동쪽 끝은 대해이다. 위魏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쳐부수자 옥저로 달아 났다. 그 뒤에 옛나라로 돌아왔으나 남은 사람들이 신라를 세웠다.그래서 그 나라(신라) 사람들은 화하 華夏 고구려 백제 사람이 섞여 있다. 옥저沃沮 불내不耐 한韓 예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왕은 본래 백제인인데 바다를 통해 신라로 들어 와 그 나라 왕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晉(진대)-前秦錄 新羅 在百濟東 符堅建元十六年 符洛反 遣使徴兵 於百濟新羅等國 並不從 秦書 符堅建元十八年 新羅國王 樓寒(按 蒙古語 謂 龍曰婁 寒字 當即 汗音之訛)遣使朝獻 通志 新羅國 在百濟東南 五百餘里 東濵大海 其王本百濟人 自海入新羅 遂王 其地其國 初附屬于百濟 後因百濟伐髙麗 人不堪戎役 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 伽羅 任那 諸國滅之 其西北界 出髙麗之間 先是其國小 不能自通 符堅時 其王樓寒 遣使衞頭朝貢 堅曰卿言 海東之事 與古不同 何也 對曰 亦猶 中國時代變革 名號改易今焉 得同
『전진록前秦錄』에는 “신라는 백제의 동쪽에 있다. 부견符堅 건원建元 16년 부락符洛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신을 보내 백제, 신라 등의 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는데 모두 따르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진서秦書』에는 “부견 건원 18년 신라국왕 루한樓寒 (살피건대 몽골어로 용龍을 누婁라 하는데 한寒은 곧 칸汗의 발음을 다르게 적은 것이다.)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통지通志』에는 “신라국은 백제 동남 5백여리에 있다. 동쪽끝은 대해이다. 그 왕(3)은 본래 백제인으로 바다를 통해 신라로 들어와 왕이 되었다. 그 영토와 나라는 초기에 백제에 부속되었다. 뒤에 백제가 고구려를 칠 때 사람들이 노역을 참지 못해 서로 가솔을 이끌고 신라로 들어 와서 드디어 강성해지자, 가라伽羅 임나 任那 등 여러 나라를 쳐서 없앴다.
그 서북 경계는 고구려 사이로 튀어 나왔다. 일찍이 그 나라(신라)가 작아서 스스로 {진나라와} 통할 수 없었다. 부견符堅때에 그 왕 누한樓寒이 사신 위두衞頭를 보내 조공을 하니, 부견이 말하길 “그대는 해동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