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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楚)나라 장왕(莊王)과 당교(唐敎)와의 고사는 ‘절영자(絶纓者)’, 또한 그러한 연회는 ‘절영회(絶纓會)’등으로 불리는 고사입니다.오늘 소개드리는 위진(魏晉)시대,비운의 천재인 조식(曹植)의 글인 <구자시표(求自試表)>에서 이 고사가 다시 등장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조식(曹植)은 자신의 형인 조비(曹丕)와 권력투쟁을 벌이다 패합니다.조비(曹丕)는 부친인 조조(曹操)가 붕(崩)하자 위왕(魏王)에 등극하고,3년 뒤인 AD220년 껍데기만 남은 한(漢)나라의 헌제(獻帝)에게서 제위(帝位)를 선양(禪讓)받아 문제(文帝)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러한 조비(曹丕)시대의 도래는 반대로 조식(曹植)에게는 고난의 시대로 다가오게 됩니다.조비(曹丕)는 자신의 정적(政敵)이었던 조식(曹植)을 모반죄를 씌워 죽이려 하다가,형제의 우애를 생각해 일곱 걸음 만에 詩를 지으면 살려주겠다고 하였고,이에 조식(曹植)이 그 유명한 <칠보시(七步詩)>를 읊어 조비(曹丕)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기록이 <세설신어(世說新語)> 문학편(文學篇)에 짤막하게 나옵니다.
청(淸)대의 곽말약(郭沫若)이란 대학자는 이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오는 <칠보시(七步詩)>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였지만, 어쨌든 조식(曹植)이 많은 박해를 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226년 형인 조비(曹丕)가 붕(崩)하고,조카인 조예(曹叡)가 명제(明帝)에 즉위한 후로도 자신에 대한 박해가 계속되자,조식(曹植)은 ‘스스로 쓰이기를 구하는 상소문’인 유명한 <구자시표(求自試表)>를 올립니다.
이 글에서 조식(曹植)은 자신이 전날 저지른 작은 과오를 용서해 준다면 더 큰 보답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자신의 각오를 음과 같은 짤막한 글에 담아 표현하고 있습니다.
“絕纓盜馬之臣赦,楚趙以濟其難
(초(楚) 장왕(莊王)과 진(秦) 목공(穆公)은 각각 갓끈이 끊어진 자와 왕의 말을 훔친 자를 용서함으로써, 楚나라와 趙나라의 난을 구해내게 하였던 것입니다.)”
注: <求自試表>에서는 秦을 趙로 표기하고 있는데, <史記>에 의하면,趙나라의 선조는 秦나라와 같으니, 같은 조상을 모시는 관계로 趙라 표시한 것임.
이 글에서는 각각 ‘절영(絶纓)’과 ‘도마(盜馬)’란 고사가 등장합니다.모두 임금에게서 작은 은혜를 입은 후, 나중에 임금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보답하는 일화들입니다.‘절영(絶纓)’의 고사를 <설원(說苑)>에 나오는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갓끈이 끊어진 자(絕纓)의 고사는, 전국 시대 楚 장왕(莊王)이 밤에 군신(群臣)에게 잔치를 베풀어 (모두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촛불이 꺼졌는데 어떤 자가 왕의 미인의 옷을 끌어당기자 미인이 그 자의 갓끈을 잡아 끊어 왕에게 고하고 (그 자를 찾아서 벌을 주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신하들에게 술을 내려 취하게 하고는,여인네들의 정절을 드러내는 것은 과인이 취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고는 좌우(左右)에게 불을 키지 말라고 명하고는,“과인과 술을 마시면서 갓끈이 끊어지지 않은 자는 기뻐하지 않는 자이다.” 하니,
신하들이 다 갓끈을 끊고 잔치를 즐겼다. 그 뒤 진(晋)나라와 싸울 때 그 자는 다섯 번 싸워, 다섯 번 적장의 목을 베어(五獲首却敵) 장왕(莊王)의 은혜를 갚았다.
(說苑曰:楚莊王賜群臣酒,日暮,華燭滅,有引美人衣者,美人援絕冠纓,告王知之。王曰:賜人酒醉,欲顯婦人之節,吾不取也。乃命左右勿上火,與寡人飲,不絕纓者不懽也。群臣纓皆絕,盡懽而去。後與晉戰,引美人衣者五合五獲,以報莊王。)’
그 다음, ‘도마(盜馬)’의 고사는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여씨 춘추에 나오는 말을 훔친 자(盜馬)의 고사는, 이전 秦 목공(穆公)이 타던 말중 우측 복마(服馬)를 잃었는데, 야인(野人)이 이 말을 취했다.목공(穆公) 스스로 찾아 나섰는데, 기산(岐山) 남쪽에서 야인(野人)이 막 그 말을 잡아먹은 것을 보았다. 목공(穆公)은 웃으며 말하기를, “준마의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네 몸이 상할까 염려된다.” 하고, 술을 하사하고 갔다.
그 뒤에 목공(穆公)이 한원(韓原)에서 晋나라와 싸우다가 포위되었을 때 晉의 양유미(梁由靡)가 목공(穆公)의 좌측 참마(參馬)를 쳐서 쓰러뜨리는 위험한 상황에,그 자가 다른 야인(野人) 3백여 인을 거느리고 와서 목공(穆公)을 위해 마차 아래서 필력을 다해 싸우니, 마침내 큰 승리를 거두어,晉의 혜공(惠公)을 사로잡아 귀환하게 되었다.
(呂氏春秋曰:昔者秦繆公乘馬右服失之,野人取之,繆公自往求之,見野人方將食之於岐山之陽。繆公笑曰:食駿馬之肉,不飲酒,余恐傷汝也。遍飲而去。韓原之戰,晉人已環繆公之車矣,晉梁靡已扣公左驂矣,野人嘗食馬於岐山之陽者三百有餘人,畢力為繆公疾鬥於車下,遂大克晉,及獲惠公以歸。此秦而謂之趙者。)’
‘절영(絶纓)’과 ‘도마(盜馬)’란 고사가 더욱 유명해지게 된 것도,조식(曹植)의 이 명문(名文)에서 인용되고 난 이후임은 물론입니다.
<하태형/서예평론가/(주)소너지 대표이사/경영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