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9월 무렵, 극단아리랑에서는 김명곤 작, 조항용 연출의 「격정만리(激情萬里)」를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격정만리」는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 때까지의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 살다가 간 연극배우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1920년대의 '왜색 신파'로부터 '한국적 신파극'을 모색하는 시기의 이야기, 1930년대의 '신극' 운동과 '카프' 연극운동, 그들과 신파극과의 갈등, 1940년대 '친일연극'의 실상과 만주에서 활약하던 조선의용군의 '항일연극', 해방 이후 좌·우익 연극의 대립, 1950년의 전쟁과 극좌·극우 '선전극'의 대립 등 식민 지배와 분단으로 인한 역사의 비극이 주인공 연극배우의 삶을 중심으로 그려집니다.
또 한국연극사의 중요한 작품들이 극중극으로 보여져서 연극사의 흐름과 변천을 한눈에 살펴볼 수가 있게 짜여져 있습니다.
일본 대중소설인 「곤지끼야사(金色夜叉)」를 번안한 신파극 「장한몽(長恨夢)」, 땅을 잃고 고국을 떠나는 농민들의 수난을 그린 박승희의 「아리랑 고개」, 송영의 카프 연극 「호신술」,「홍도야 우지마라」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도 되고 악극화도 된 임선규의「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북한의 혁명가극「피바다」의 원전으로 알려진 「혈해지창(血海之唱)」, 좌익 선동극인 신고송의 「서울 갔던 아버지」, 그 외에 고골리의 「검찰관」, 유치진의 친일연극「대추나무」 등이 주인공들의 연습 장면이나 공연 장면으로 잠깐씩 소개됩니다.
이 작품은 한국연극협회가 주최하는 <서울연극제>의 자유참가작으로 선정되어 모든 홍보와 공연 계획도 거기에 맞춰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고동업, 권태원 등 극단아리랑의 배우들과 함께, 기성 연극배우들도 여럿 참여한 야심적인 기획이었습니다. 지금은 텔런트로 방송에서 맹활약하는 중견의 연극배우 최종원과, 지금은 여성 영화감독으로 활약하는 미모의 신인여배우 방은진 등이 흔쾌하게 작품에 참가하여 열심히 연습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내용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가진 <서울연극제> 집행위원들이 극단아리랑의 연습장에 와서 연습을 참관한 후, 우리하고는 상의 한마디 없이 전격적으로 '서울연극제 참가 취소' 결정을 내렸습니다.
극단아리랑 앞으로 보낸 취소 공문에 따르면 이 작품이 “우리 신극사의 원류를 신파극으로부터 시작하여 1930년대의 좌익 연극운동인 카프로 이어져서 북한 김일성 체제하의 사회주의 연극을 거쳐, 오늘날 남한의 민중극 또는 민족극으로 계승되는 것으로 해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연극사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신파극, 신극, 좌익연극 어느 쪽에 어느 만큼의 비중을 두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예술관과 연극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제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그 동안 남한의 연극계는 <토월회>를 기점으로 한 신극운동의 흐름에 정통성을 부여해 왔고, 북한의 연극계는 김일성이 주도한 <항일혁명연극>에 그 정통성을 부여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양쪽 모두 분단적 역사관의 틀 속에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연극 행위는 지나치게 확대하거나 미화하고, 상대의 연극 행위는 지나치게 축소하거나 매도하는 잘못을 저질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연극사의 여러 자료들을 섭렵해 보니 신파극이나 좌익연극이나 신극 모두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작품을 썼기 때문에, 제가 한국연극의 흐름을 신파극에서 카프로, 그리고 김일성의 사회주의 연극으로 파악했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극중 인물 중 몇 사람이 친일적이고 친미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는 데 대해, “한국연극협회에 소속된 연극인들을 친일·친미의 반동적 연극 세력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한 취소 공문의 글은 지나친 자격지심의 발로라고 반박했습니다.
저는 극 중에 등장한 여러 인물들을 통해 굴절과 타협, 그리고 오욕의 역사 속에서 예술가들이 어떻게 대처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려고 했을 뿐, 그들을 통해 오늘날의 남한 연극인들을 매도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습니다.저는 한국연극협회에 공개 토론회를 제안했습니다. 공연을 직접 본 뒤, 저와 연극제 관계자들과 평론가들이 관객들 앞에서 토론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와, 집행위원회의 권리 남용에 대한 우려를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제기했습니다.
몇몇 집행위원과 심사위원, 그리고 연습에 참관했던 위원 몇몇 분은 솔직하고도 양심적인 발언으로 집행부의 처사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또한 주변의 예술가나 예술단체들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집행부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참가취소 요구 서명 운동에 3백 명에 가까운 연극계 선후배들이 서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1차 공연과 2차 공연 내내 극장 안을 뜨겁게 달구었던 관객들의 유례없는 성원 등으로 많은 격려와 성원이 있었습니다. 그 해의 연극계를 뒤흔들었던 '격정만리 사건'은 연말이 되면서 잠잠해졌습니다.
"연극하는 사람이 연극배우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면 무척 재미있을 것이다."
처음 이 작품의 구상을 시작했을 때, 저는 그렇게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소재를 깊이 파들어 가면 갈수록 재미있을 수 만은 없는 여러 문제들이 저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의 분단 시대는 예술가들에게 괴로운 선택을 강요한 시기였습니다.
저는 이작품을 쓰면서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보다 그러한 선택이 몰고 온 비극에 촛점을 맞췄습니다. 제가 연극을 하면서 괴로워했던 문제들의 근원이 거기에 있었고, 그 문제들을 붙들어 안고 고민했던 동료, 선배, 후배들의 비극이 거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