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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오질서(與吳質書)
일전에 낙신부(洛神賦)를 소개드리면서,조식(曹植)과 조비(曹丕), 두 형제간의 갈등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권력이란 비정한 것이어서,친형제간인 이 두 사람은 부친인 조조(曹操)의 살아생전부터 후계자 자리를 놓고 치열하기 짝이 없는 권력투쟁을 벌입니다.
당연히 신하들도 이 두 캠프를 놓고 어느 쪽으로 줄을 서느냐의 눈치 보기가 극에 달하게 됩니다.당시, 조비(曹丕)측의 핵심참모는 오질(吳質)이란 사람이었으며,조식(曹植)측의 핵심참모는 바로 ‘계륵(鷄肋)’의 고사로 유명한 양수(楊修)란 사람이었습니다.당시의 상황에 대한 글이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魏王(조조-曹操)이 일찍이 출정할 때면,세자(조비(曹丕)) 및 임치후(臨菑侯: 조식(曹植))가 전송을 하였는데,조식(曹植)이 아버지의 공덕을 기리는 문장을 지어 바치니,좌우신하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훌륭하였고, 위왕(魏王)또한 기뻐하였다.
이에 세자가 낙심하여 있으니, 오질(吳質)이 귀 뜸하길, “왕이 행차하실 때 그냥 눈물만 흘리십시오”하였다. 또다시 왕이 출정할 때, 세자가 읍을 하고 울먹이니,왕과 신하들이 감동하여 한숨을 쉬었다. 이에 모두가 조식(曹植)의 글은 화려하지만,정성은 조비(曹丕)에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世語曰:魏王嘗出征,世子及臨菑侯植並送路側。植稱述功德,發言有章,左右屬目,王亦悅焉。世子悵然自失,吳質耳曰:「王當行,流涕可也。」及辭,世子泣而拜,王及左右咸歔欷,於是皆以植辭多華,而誠心不及也。)
이런 오질(吳質)이란 뛰어난 참모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위(魏) 문제(文帝) 조비(曹丕)는 동생인 조식(曹植)이 워낙 뛰어나 그의 명성에 가려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만,사실 매우 뛰어난 문장가였습니다.
왕좌에 오른 뒤에도 자신의 친우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던 오질(吳質)을 그리워하던 그는,마침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는 재앙이 닥치자, 당시 오질(吳質)이 다스리던 조가현(朝歌縣)으로 직접 편지를 보내, 그의 안부를 걱정합니다.
<여오질서(與吳質書)>라 이름 붙은 이 명문(名文)의 편지 말미에 그는 오질(吳質)에 대한 그의 정을 다음과 같은 짧은 문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痛知音之難遇,傷覆醢之莫逮
진실한 친우(知音)를 다시 만나기 어려움에 가슴아파하며,뛰어난 신하(覆醢)를 다시 보기 어려움에 슬퍼하노니...
여기서 ‘지음(知音)’과 ‘복해(覆醢)’란 두 단어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먼저, ‘지음(知音)’의 고사입니다. 춘추시대 楚나라에 금(琴)의 명인(名人)인 백아(伯牙)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종자기(鍾子期)란 둘도 없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말인데,백아(伯牙)가 거문고를 들고 높은 산에 오르고 싶은 마음으로 이것을 타면 종자기(鍾子期)는 옆에서, "참으로 근사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산이 눈앞에 나타나 있구나"라고 말하고,또 백아(伯牙)가 흐르는 강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鍾子期)는 "기가 막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눈앞을 지나가는 것 같구나" 하고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종자기(鍾子期)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일이 발생합니다.그러자 백아(伯牙)는 금(琴)을 부수고 줄을 끊은 다음(破琴絶絃)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이 세상에 다시는 자기 거문고 소리를 들려 줄 가치가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위(魏) 문제(文帝) 조비(曹丕)는 이 고사를 들어, 가장 자신을 잘 이해해주는 둘도 없는 친구란 의미로 ‘지음(知音)’이란 단어를 처음으로 창조해 냅니다.
그 다음은 ‘복해(覆醢)’의 고사입니다. 논어(論語)에는 많은 제자들이 등장합니다.3,000여 제자 중, 가장 성격도 급하고, 스승인 공자님에게 꾸중도 많이 듣고 또한 대들기도 가장 많이 한, 그러면서도 공자님과 가장 끈끈한 인간적인 유대감을 유지한 제자가 바로 자로(子路)입니다.
그런데, 이 자로(子路)가 위(衛)나라에 일어난 반란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그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자로(子路)의 죽음을 전해들은 공자님의 슬픔을,<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자가 자로(子路)의 죽음을 슬퍼하여 정원에서 哭을 하고 있었는데 조문을 온 사자(使者)가 있어, 공자에게 절을 하고 곡을 하였다.그가 나올 때 자로(子路)가 어떻게 죽었냐고 물으니,자로(子路)가 '해(醢: 젓갈)'로 만들어졌다고 사자(使者)가 대답하였고,이에 분노한 공자가 집안에 있던 '해(醢: 젓갈)'를 엎어버릴 것을 명했다.
(禮記曰孔子哭子路於中庭, 有人弔者, 而夫子拜之.哭, 進使者而問故, 使者曰, 醢之矣. 遂命覆)
이 고사에서 위(魏) 문제(文帝) 조비(曹丕)는 둘도 없는 문인(門人),또는 신하(臣下)의 의미로 ‘복해(覆醢)’란 단어를 만들어 냅니다.즉, 그 문인(門人), 또는 신하(臣下)가 죽고 없어지면 그 슬픔을 비할 데가 없게 만드는 존재감이란 의미입니다.
다시 원문으로 돌아가 살펴보면 더 뜻이 깊게 와 닿습니다.
痛知音之難遇,傷覆醢之莫逮
지음(知音)의 경지에 달한 진정한 친우를 다시 만나기 어려우며,복해(覆醢)할 만큼 슬퍼할 뛰어난 신하(臣下)도 다시 보기 어려움에 가슴 아파하노니...
위(魏) 문제(文帝) 조비(曹丕)의 오질(吳質)에 대한 깊은 애정이 이 짧은 구절 안에 함축되어 표현되고 있습니다. 漢文의 매력은, 바로 이러한 축약(縮約)에 있으며,그런 점에서 이 글은 천고(千古)의 명문(名文)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우리는 이런 지음자(知音者)와 복해자(覆醢者)가 있는 건가요?자문(自問)해볼 노릇입니다.
주군이자 하늘같은 태자(太子)인 조비에게서 자신을 염려하는 편지 <여오질서(與吳質書)>를 받게된 신하인 오질(吳質)입장에서 답신을 올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따라서 오질(吳質)은 답신을 보내게 되는데,
그 글이 <답위태자전(答魏太子牋)>이란 이름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편지글에 제목이 원래 붙어 있을 리는 없으나,훗날 편의상 제목을 붙여 구분하는 것입니다.편지글의 한 형태로서 '전(牋)'이라 하는 것은,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올리는 글을 말하는데,천자에게 올리는 글을 표(表), 황후나 태자에게 올리는 글은 전(牋)이라 부릅니다.
이 편지의 내용은 크게 주목할 만한 부분이 없지만,<여오질서(與吳質書)>에 대한 답신이고 또한 당시 윗사람에게 올리는 편지글인 '전(牋)'의 형태가 어떠했는지 살펴보는 의미에서 아래와 같이 소개드립니다.
답위태자전(答魏太子牋)
"경인년 2월8일 臣 오질(吳質)이 말씀드립니다.손수 쓰신 편지(手命)를 받들어 읽으매,(이번 역질(疫疾)로 인한) 망자(亡者)들에 대한 추모의 생각,그들에 대한 깊은 슬픔이 문장에, 그리고 글씨에 배여 있음을 느꼈나이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매,지난날 다른 건안칠자(建安七子)들과 함께 주군(主君)을 좌우에서 모실 때, 미복(微服)으로 잠행할 때도 따라 나서며,대궐로 돌아와서는 함께 음악을 들으며 술을 나누고,시(詩)를 지으며 주군(主君)의 만수(萬壽)를 축원하고,서로가 얘기하길 ‘죽을 때 까지 한 결 같이 서로를 보호하며 있는 힘을 다해 주군(主君)의 밝음과 절조를 만천하에 드러내자’ 하였거늘, 수 년 사이에 대부분이 역질(疫疾)로 말미암아 죽어버리는 와중에, 臣 홀로 살아남는 德을 입음이 어찌 이리도 심한지요?
(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