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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본은 독도영유권을 당당하게 내세우고 있는가?
왜 일본은 독도영유권을 내세우는가? 국제협약상 직접적 발단은 경제개발비용을 받으면서 독도영유권을 포기해 버린 박정희 군사정권이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나라가 어렵다고 영토까지 포기한 굴욕적인 협약은 그래서 매국매족적 행위라는 것이고 외세보다는 외세를 부르고 외세의 개입을 부르는 내부의 악성종양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월간중앙>은 창간 39주년 기념 4월호에서 "한.일 협정 체결 5개월 전인 1965년 1월 11일 서울 성북동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자택에서 정일권 국무총리와 우노 소스케 자민당 의원이 독도밀약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독도밀약은 한.일 협정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독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맺어졌다.
월간중앙이 한국과 일본의 생존자 증언과 자료를 근거로 추적한 독도밀약은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일단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한.일 기본조약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4개 부속조항으로 구성됐다.
부속조항은 ▶독도는 앞으로 한.일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 수역으로 한다 ▶현재 한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 나간다 등의 4개 항이다.
월간중앙은 "그 독도밀약은 합의 다음날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으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우노 의원은 그간 비밀 유지를 위해 이용하던 용산 미군기지에서 일본의 고노 이치로 건설장관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으며, 고노는 이를 당시 미국을 방문 중이던 사토 총리에게 전했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김종필 전 총리의 친형 김종락(88.사진) 당시 한일은행 전무였다. 당시 김 전 총리는 한.일 협정 굴욕협상 반대시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의 반 타의 반' 외유를 떠난 상태였다. 김씨는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이 독도 문제를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 일단 해결로 간주한다'는 아이디어는 내가 냈다"며 "박정희 군사정부는 독도밀약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한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언명과 함께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일본정부가 독도는 일본 땅하면서 역사교과서에도 당당히 게재하며 큰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저러한 배경을 아직도 잘 모르는 국민과 영남인들은 차기에 독도영유권 포기해 버린 박정희 딸 박근혜를 우리가남이가하면서 몰표로 찍어댈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일본이 "조센징! 빠가야로!" 하면서 우습게 안다는 사실도 알자. 외부의 적을 이롭게 하는 내부의 우리가남이가 영남세력이 권력을 잡고서 나라와 민족이 늘 불안하고 혼란스럽고 국가부도사태까지 갔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이 알 때도 되었다.
국민 대부분이 불만없는 국민의 뜻과 정서가 민주다. 책임지는 자유와 더불어 사는 복지와 하나가 되는 통일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공존이 바로 국민과 인류의 뜻이고 보편적 정서다. 고로 국민과 인류의 보편적 정서에 부합하게 섬세하면서도 단호하고도 추진력이 있고 포용적인 시원 시원하고 따뜻한 리더쉽을 가진 통치자들을 민족과 인류는 기다리고 있다.
해민족이 인류중심 인류부모국이 될 것이라고 예언해 놓은 남사고 예언서 [격암유록]
조선을 떠나 동양 최고의 예언서로 불리우는 [격암유록]은 그 진위여부에 논란이 많지만, 조선조 중종 때 남사고에 의해 작성된 예언서라고 전해진다.그러나 당시 임진왜란 예언 등 남사고와 관련된 일화가 많아 [격암유록]의 내용을 허위로 치부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조선 중기 현 경북 울진 태생의 학자인 남사고는 본관이 영양(英陽)이고 호는 격암(格庵)이다. 효행과 청렴으로 이름이 났으며 소학(小學)을 즐겨 읽었던 그는 역학, 풍수, 천문, 복서, 관상의 비결에 도통하여 많은 예언을 하였는데 꼭 들어맞았다고 한다. 명종 말년에는 동서분당(선조8년,1575년)을 예언했고, 명종 19년에는 "내년에 필연코 태산을 봉하리라"했는데 이듬해 문정왕후가 죽어 태릉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는 또 임진왜란을 예언했는데 "살기가 심히 악하여 임진년에 왜적이 크게 쳐들어올 터이니 부디 조심하라"고 다른 사람한테 말했는데 과연 그해 임진왜란이 터졌다. 그는 또한 풍수지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가 어린 시절 서당에 다닐 때 이유 없이 자꾸 야위어 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훈장이 까닭을 물어보니 서당에 올 때마다 여우목 고개에 예쁜 여자가 나타나 입맞춤을 하자면서 자신을 희롱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묘령의 여자는 입맞춤을 할 때마다 입 속에 구슬을 가지고 논다고 하였다. 훈장은 여우가 여자로 둔갑한 것임을 알고 다시 입맞춤을 할 때 여자 입 속의 구슬을 빼앗아 삼키고 도망치라고 일러 주었다.
다음날 서당에 오는데 또 예쁜 여자가 입맞춤을 하자면서 따라 오자 남사고는 스승이 시킨 대로 얼른 여자의 입 속에 있는 구슬을 삼키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처녀가 구슬을 내놓으라고 뒤쫓아오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땅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처녀는 늙은 여우로 변하면서 슬피 울다가 되돌아갔다.
허겁지겁 서당에 온 남사고를 보고 훈장은 넘어질 때 어디를 제일 먼저 보았냐고 묻자 땅을 제일 먼저 보았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훈장은 탄식을 하면서 "아깝도다! 넘어질 때 하늘을 먼저 보았으면 천문에 능했을 텐데 땅을 보아 지관에 머물겠구나"하였다 한다.
남사고가 젊었을 때 경북 울진 불영사를 가던 길에 승려를 만났다. 둘은 같이 유람하다가 소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중은 갑자기 소리를 내지르더니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한참만에 모습을 드러낸 승려는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고 남사고는 "무엇이 두려운가"라고 태연히 대답하였다. 그러자 승려는 "그대는 능히 두려워하지 않으니 내가 가르칠 수 있다. 그대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니 힘써 보라"하면서 비결을 주고 사라져 버렸다.
남사고는 이로부터 천문지리와 미래를 통하게 되었고 세상일을 정확하게 예언을 하여 지금도 `남사고 결록` `격암유록` 등이 전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책이 실제로 남사고가 쓴 책인지 아니면 후세에 누군가 남사고의 이름을 도용하여 쓴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런데, 남사고 예언서 [격암유록]에는 우리 해민족에게는 다음과 같은 기분좋은 예언 기록들이 있다.
"동방의 금수강산, 우리 조선에 천하의 새 기운이 돌아 든다. 태고 이래 처음 있는 무궁한 도법이 꽃피니, 무궁화 동산 조선은 세계의 중심으로 화하고 세계 모든 백성의 부모나라가 되리라."-격암유록 말운가
"영웅호걸과 현인군자.대관대작.부귀자는 도매금에 넘어 가리니 아래에서 위로 구원이 미치는 이치로서 소울음 소리를 내는 자가 먼저 살 수 있으리라."-격암유록 격암가사
"천마리의 닭 중에 한 마리의 봉황이 있으니 어느 성인이 진정한 성인인가. 진짜 성인 한 사람을 알려거든 ‘소울음 소리’가 있는 곳을 찾아 드소."-격암유록 송가전
우리 해민족이 인류중심 인류부모국이 되며, 화려하게 치장하고 폼 잡고 다니는 호걸들과 고관대작들과 부자들은 도매금으로 추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