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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 씨가 2주일 만에 슈퍼스타로 뜨게 된 계기가 있었다. 기막힌 천운이었다. 기억하시는가? TBC가 문을 닫기 얼마 앞서 방영되었던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이란 프로그램을.
당시 고인은 별로 비중 있는 출연자는 아니었다. 무명의 엑스트라를 겨우 벗어나 간간이 단역으로 얼굴을 내미는 정도였다. 어느 날 이주일씨에게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의사가 배역으로 떨어졌다. 방송에 익숙하지 않았던 데다가 방청객을 앉히고 이뤄지는 공개녹화였다. (혹시 생방송이었던가?) 담당 PD의 지시가 쉬이 이해될 리 만무했다.
PD가 의사로 분장한 이주일 씨에게 신호를 보냈다. 환자의 안구를 살피고 임종했음을 가족에게 알리라고. 방송국 코미디언으로서는 신인이었을망정 자연인 이주일은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늙은 가장이었다. 잘해야겠다는 부담과 중압감이 오죽했으랴. 긴장하고 당황한 이주일 씨, 자기 눈에 손을 대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운명하셨습니다!”
그 한마디가 희극배우 이주일의, 나아가 한국 코미디계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변두리 밤무대에서 사회자 노릇으로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던 이주일 씨는 승승장구를 거듭해 서울에서 가장 큰 야간업소의 사장이 되더니, 급기야 코미디언으로는 최초로 국회의원 배지까지 달게 되었다.
의사가 제 눈꺼풀을 뜬금없이 열어젖히고 “운명하셨습니다!”라고 생뚱맞게 외치는 광경. 어린 내가 보기에도 너무나 임팩트가 강했다. 웃기기도 하고 허망하기도 하고. 4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명장면이다.
우리세대는 비슷한 시기에 난데없이 출현해 거침없이 출세가도를 달린 두 명의 대머리 아저씨를 TV 화면으로 만나면서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했다. 뉴스의 앞꼭지를 독점한 대머리 독재자는 공포를 불어넣었고, 쇼와 코미디를 주름잡은 대머리 희극인은 기쁨을 나눠주었다.
이주일 씨의 작고로 생긴 공백을 전두환이 메우려는 것일까. 독재자는 가진 재산이라고는 최저생계비에도 미달하는 29만 원뿐이라 강변하는 희대의 코미디를 연출한다. 역할이 뒤바뀌었음은 확실하다. 이주일 씨는 폐암으로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고 도무지 웃을 수 없는 진지하고 비장한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남겼으니, “담배는 독약입니다.”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나이였으므로 우리들은 이주일 씨의 익살스런 오리궁둥이춤에 별다른 고민과 거부감 없이 열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성세대는 “운명하셨습니다!"라는 짤막한 메시지에 심란하고 착잡한 심경을 감추기 힘들었을 듯하다. 유신체제의 철권통치자는 충복이 술자리에서 쏜 흉탄으로 운명했다. ‘서울의 봄’은 광주의 대학살로 운명했다. 한강다리 밑에 가득히 서식하던 개구리와 잠자리들은 왜색명칭인 ‘고수부지’로 명명된 삭막한 콘크리트 시설의 완공을 기화로 운명했다.
오늘 정치권에서 또 한편의 코미디가 벌어졌다. 진정성과 비분강개를 마케팅해 정치적 지지세를 불려온 유시민 의원이 열린우리당이 사망 직전의 중증환자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 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이이 그랬다면 젊고 예쁜 아가씨들에게 밀려 뒷방신세로 전락한 갱년기 아줌마의 히스테리성 콤플렉스로 냉소에 부쳤으리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정부여당의 재벌편향 정책을 위중한 의학적 상황에 빗대어 표현했다면 서민들의 답답한 심정을 후련하게 풀어줬을 터.
일순 아연해졌다. 동시에 유시민 의원의 편리한 사고체계가 부러워졌다. 잘된 일은 선수 자격으로 끼여 들고, 안된 일은 심판이나 해설자 신분으로 살짝 외곽으로 피하는. 현실정치에 발을 담근 이후의 유시민 의원만큼 세상 참 쉽게 사는 양반은 대한민국에 없을 성싶다.
유시민 의원은 열린우리당 전당대회를 통해 비록 턱걸이로나마 상임중앙위원으로 선출된 인물이다. 여당이 망하면 반사이익을 누릴 야당 정치인이 아니란 말씀이다. 사건의 시시비비만 품평하면 만사 오케이인 시사평론가나 토론프로 진행자는 졸업한 지 오래다. 열린우리당 창당주역으로 당이 중병에 걸리도록 방치한 책임의식을 공유해야 옳다. 이건 어렵게 머리 굴려 판단할 복잡한 사안이 아니다. 기본적인 도의와 도리의 문제다.
다양한 기능과 용도를 구비한 제품들이 유행하는 요즘이다. 국민은 유시민 의원에게서 새로운 사실을 배운다. 진단서가 면죄부 구실도 겸한다는. 열린당이 국민과의 관계에서 목숨이 간당간당한 중증환자가 되어버린 사태에 대해 유시민 의원은 누구보다도 책임을 통감해야 마땅하다. 나도 잘못했지만 너도 잘못했다며 두루뭉술 어영부영 단독탈주를 시도해서는 곤란하다. 유시민 의원으로 말미암아 속담마저 변하겠다. “병 주고 약 주고”로부터 “병 주고 진찰하고”로.
부익부 빈익빈 추세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참여정부의 지지기반은 서민대중이다. 그들은 양극화를 저지하고 극복할 대안과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서민들의 여망을 집권세력은 교묘히 바꿔치기했다. 실용으로 각색해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해괴한 슬로건을 창안했다. 아니면 껍데기와 목소리와 무늬만 강경한, 천박한 개혁상업주의로 변질시켜 참정연이니 국참연이니 하는 특정계파들의 권력지분을 챙기는 데 골몰하든지.
우리는 유시민 의원이 한 짓을 알고 있다. 유의원은 한나라당과의 연대가 사회경제개혁을 지향하는 민주노동당과의 공조보다 비용이 저렴하다는 망발을 서슴지 않았다. 취업은 셀프라는 신자유주의적 발언을 함부로 내뱉었다. 당내의 지엽적 현안에 불과한 기간당원제 도입 여부가 국가의 백년대계를 좌우할 개혁의 알파요 오메가라는 식으로 여론을 호도해왔다.
열린우리당이 중증환자라 진단한 유시민 의원의 소견을 전해 듣고 왜 자꾸만 이주일 씨가 연상되는지. 정계를 은퇴하고 유의원이 복귀할 공간은 평론과 저술이 아니라 아무래도 개그나 코미디 분야가 아닐까. 유의원의 열성 지지자들은 무지막지한 사이버폭력의 집단가해자로 악명이 높다. 제발 유의원이 홈쇼핑을 코미디 소재로 재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유의원과 지지자들이 ‘마대’걸레 들고 설칠까 두려워 어디 맘 놓고 숨이라도 쉬겠어?
자신의 눈을 뒤집고 “운명하셨습니다!”라고 일갈함으로써 고 이주일씨는 군사독재에 시달리던 국민에게 폭소와 삶의 여유를 선물했다. 유시민 의원의 코미디도 이주일 씨의 그것과 설정과 전개는 유사하다. 의사가 아닌 환자가 본인의 눈꺼풀을 동그랗게 열고 병자의 용태를 관찰한다는 것이 외견상 드러나는 차이점이다.
허나 유의원은 중태에 빠진 환자로 분류된 열린우리당의 핵심 당직자다. 집권여당의 ‘몸통’이자 ‘범털’로서 국민의 피부에 와 닿는 뭔가를 보여줄 의무가 있다. 같은 환자 주제에 얼렁뚱땅 의사가운으로 갈아입는 잔꾀는 영악해진 대중에게 약발이 먹히지 않음을 명심해주시라.
쓴웃음만을 자아내는 유의원의 블랙 코미디는 아류작이라고 가벼이 웃고 넘기기에 왠지 으스스하다. 죽음이 임박한 말기암 환자가 흰자위를 부릅뜨고 스스로의 사망을 선포한다면 이는 희극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비극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비극에서 희극으로 연달아 반복된다는데 어째 열린우리당은 정반대다. 희극을 비극으로 되풀이하니.
집권당의 시계가 민심의 바람과는 거꾸로 돌아간 게 하루 이틀이랴? 결국 그게 주효해 요새 초상 치를 준비에 여념이 없지만. 망자가 상주가 되고, 병상의 중환자가 의사 시늉을 내는 정당, 바로 열린우리당의 현주소이자 자화상이다.
* 2005년 6월 초에 쓴 글임. 유시민 씨가 자기를 객관화하는, 좀 더 어려운 말로 ‘타자화’하는 기술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세련되어져 갔음을 느낀다.
출처:수복(본칼럼은 유료칼럼이므로 무단전재 퍼가기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