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사는 왜 해민족사의 줄기인가?
황하문명의 근원이 만리장성 넘어 지나인들이 오랑캐 지역으로 치부한 요하지역의 홍산문명으로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듯이 환국과 배달국.단군조선의 문명을 먹고 자란 지나사는 해민족사의 줄기에 불과하다. 고로 고대부터 만주와 한반도는 분리된 적이 없고 만리장성 이전에도 지나국과 만주도 분리되지 않는 고대 해민족의 활동무대였다. 배달국 시대까지만 올라가도 오늘날 지나인들은 대부분 해민족의 혈통이다. 동남아에서 북상한 황하지역의 소수 하족이 동이족 황제헌원을 우두머리로 삼은 이후 황하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의 해민족을 동이.북이.서이.남만하면서 오랑캐 취급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배달국의 제후에 불과한 황제헌원이 백두산지역의 배달국 치우천황을 대상으로 천황이 되겠다고 도전을 해 오니 치우천황과 황제헌원과의 10년 전쟁인 탁록전쟁인 것이다. 치우천황은 장기전을 위하여 도읍을 요서지역 청구로 정하고 지나대륙을 누비며 황제헌원과의 71회나 되는 전쟁에서 백전백승했고 황제헌원으로부터 신하가 되겠다는 맹세를 다짐받았다. 이후 치우천황은 동.서방에서 전쟁신으로 추앙받게 되었으며, 유럽에서는 산타크로스의 시조가 되는 티우(치우)가 되었다.
지나대륙과 동방(만주.한반도)은 치우천황과 황제헌원과의 전쟁을 계기로 멀어지게 되었고 지나대륙을 통일한 진시황 시기부터는 동방의 단군조선에서 완전히 독립을 선언하고 동방족의 위대성을 기록한 모든 서적들을 불태우고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여 명나라시대까지 축성이 이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지나문명은 한국문명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을 청나라 멸망이후 손문.모택동 등 지나중심의 국수주의-제국주의를 내세운 지나공산당이 부정하였고 지나공산당차원에서 동북공정을 시행하여 요하지역의 홍산문명까지 지나문명으로 날조하여 환국.배달국까지 지나사로 강탈하려는 역사날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동북공정이란 단순히 고구려사를 타켓으로 삼는 게 아니라 뿌리를 날조하여 배달국 이후까지 모두 지나사로 편입시키려는 거대한 작업인 셈이다.
그러나, 지나공산당이 부지런히 역사작업을 하더라도 결국 뿌리문제에서 환국이전의 마고문명은 서남해지역을 중심으로 해머리땅일 수 밖에 없으니 뿌리는 해민족이라는 사실만 드러날 뿐이라는 역사적 진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현재의 지나국 영토도 백두산족인 여진족이 건국한 금(청)나라가 확장해 준 것이니 결국 해민족의 영토인 셈이다.왜냐하면 금(청)의 시조 김행이 바로 한반도에서 만주로 이주한 신라 마의태자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지나공산당의 주은래도 북한을 방문하여 역사를 왜곡하려는 지나국의 국수주의자들을 비난하면서 해민족 청나라가 영토를 크게 넓혀준 점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따라서 청나라 시조가 한반도 사람이니 대한민국의 영토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지나국 정부는 최소한 이러한 역사적 진실에 의거하여 양심이 있다면 우리 해민족의 터전이자, 해민족 말과 풍습을 가진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는 만주만이라도 앞으로 실현될 통일한국에 토해내야 한다.
현재 최대의 지나영토도 백두산이 낳은 해민족의 나라 청나라가 만들어 준 땅이다
100년 전까지 지나대륙을 완전히 통일하고 지배했던 청나라는 만주의 여진족이 개국한 금나라에서 출발하는 나라로 금나라를 계승하여 청나라를 개국한 누루하치 성은 '애신각라'이다.
애신각라(愛新覺羅)를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잊지 말자!"'는 의미다.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청나라를 세운 만주인들의 뿌리를 추적하면 신라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신각라'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지료'인데, '아이신'은 '금(金)'을, '지료'는 '겨레(族)'를 뜻한다. 신라 왕실의 성씨인 '김씨의 겨레' 혹은 '금', '밝음을 숭상하는 겨레'라는 말이다. 청나라라면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는 오랑캐의 나라로 불리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나라이다. 그리고 조선 인조 때는 부모의 나라 조선을 침략하지 말라는 누르하치의 차남 홍타이가 오랑캐 취급하는 조선을 침략하여 인조의 항복을 받아 내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이 오랑캐 취급한 청나라는 최고의 군사강국으로 유라시아 최강국으로 급부상하는데 명나라만 사대하던 조선이 이러한 청나라를 홀대한 결과 결국 침략을 당하여 항복하게 된 것이다.
사실 누르하치는 청나라를 개국하기 전에 조선에서 벼슬을 하고 싶다며 벼슬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거부당하자, 여진족을 규합하여 후금을 건국하였고, 철저한 전쟁준비로 결국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지나대륙을 흡수한 다음에는 '청'으로 국호를 바꾼 것이다. '청'은 하늘을 상징하는 푸른색으로 초원세력이 추구하던 색이다. 신라가 3-4세기 지나대륙과 만주에서 유입된 흉노.선비(모용씨)족의 나라다 보니 역시 신라의 색 또한 '청'이였다. 모용 선비족은 김알지세력과 연합하여 신라을 개국한 후에 성씨를 모씨에서 김씨로 바꾸고 자기혈족끼리 혼인하여 왕족을 형성하는 골품제를 통하여 신라왕실을 유지했다.
그런데 왜 청나라 왕조의 성에 '신라'와, 신라 왕족의 성 인 '김(金)'이 포함되어있는 것일까?
역사연구단체 한배달의 오정윤 연구원의 견해에 따르면"청나라는 우리나라를 어버이의 나라로 섬겼습니다. 예를 들어 임진년에 일어나 조.일전쟁 때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가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썼었지요. 또 유명한 삼전도 항복 때는 친명배금을 외치는 조선에 와서 '원래 우리는 고려인의 후손으로 그대들과 같은 나라였다는 취지로 '그대는 왜 동족을 따르지 않고 명나라를 돕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청은 조선에 번번이 형제의 도리를 강조했습니다. 조선은 명분론에 매여 끝까지 청을 형제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말이죠."
역사연구단체 한배달의 오정윤 연구원은 먼저 청나라가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섬긴 예를 들었다. 그는 누르하치가 백두산 지역에서 태어난 것을 지적하며, 당시 백두산 지역에는 만주계 조선인이 많았고 그들 중 상당수가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고려인 또는 조선인으로 귀화했다고 설명했다. 한 때, 누르하치도 평안도 지방관현에 벼슬을 수차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는 이야기까지 하고 나서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왜 청나라가 끝까지 조선에 호의적이었을까요? 바로 청나라가 김(금)나라로부터 나왔고 금나라는 신라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 이덕일 씨도 오 연구원과 의견을 같이 했다. "중원을 복속하고 지나족을 지배했던 곳이 청나라입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때 조선은 몹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청은 충분히 조선을 복속하고도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죠."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금나라의 태조에 대해 "신라 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김(금)이라 한다."
역사학자들의 말처럼 여진족 추장 누르하치는 김나라를 기리며 나라 이름을 '후김(금)'이라 지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금나라 태조와 정확히 어떤 혈연관계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누르하치가 계승한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가 신라인이라는 문헌들은 많이 존재한다. 먼저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金史)'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金之始祖諱函普 (금나라 시조는 이름이 함보이다), 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60세가 넘었다) 兄阿古好佛,留高麗不肯從 (형 아고호볼은 따라 가지 않고 고려에 남았다)
금나라의 시조인 함보가 60세가 넘은 나이에 고려에서 왔는데, 그의 형제는 고려에 남고 혼자만 금나라로 왔다는 이야기다.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