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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의지했던 벼농사,가뭄들면 벼도 농부도 함께 탓다.
오늘날엔 어지간이 비가 오지 않아도 물부족으로 인해 농사를 망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뭄에 대비하여 지속적으로 농업및 공업용수용 다목적댐을 많이 건설하였을뿐 아니라 시골마을 곳곳에 방죽과 대형 저수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천수답은 물론이고 가뭄이 들었을때 물이 부족할성 싶은 논은 지하수를 끌어 올려 물부족을 해결할 수 있도록 관정을 파고 모타를 설치해 놓았다.
그리고 다랭이논은 농사짓기 편하도록 합쳐 네모판식으로 만들고 트랙터,콤바인등 농기계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농로를 개설하여 현대적 기계화 영농으로 농업 생산성을 극대화시킨 경지정리,관개시설 개선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물부족 대책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가뭄으로 피해지역이 발생할 경우 각종 급수차,소방차,콘크리트 운반 레미콘차량등을 총동원,농업용수 지원 봉사활동을 전개하는 지원제도까지 활성화되어 있어 물때문에 농사를 못짓는 천수답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달리 방죽과 저수지 축조가 본격화되고 천수답에 정부예산으로 지원된 농업용수 전용 관정이 설치되기 시작전인 1970년대 중반 이전에는 농업용수 문제가 심각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천수답은 모내기를 하였더라도 마른 장마에 가뭄이 닥치면 말라 비틀어지는 벼와 함께 농부들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제발 비를 내려달라고 정성을 들여 기우제를 올려 빌었지만 무심한 하늘이 끝내 비를 주지 않으면 묘를 써서는 안될 신성한 산봉우리에 묘를 써서 하늘이 노하여 비를 주지 않는다면서 동네 사람들이 삽과 괭이를 들고 떼지어 올라가 묘를 파헤치는 일도 있었다.
농사 성패를 죄우하는 도랑물을 가두는 보매기(보막이)
이처럼 물은 밭농사도 물론이지만 먹느냐 마느냐,사느냐 죽느냐의 생사존망을 좌우하는 식량공급원인 벼농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아무리 농사기술이 좋고 거름을 많이 해놓았어도 물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물이 한해농사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에 농부들은 물관리에 온갖 열정을 쏟고 지나칠만큼 물욕심을 부렸다.
일년 열두달 물이 고여있는 수렁논과 논가에 땅에서 물이 솟는 둠벙이 있으면 물걱정을 하지 않지만 도랑물을 끌어다 벼농사를 짓고 도랑물을 끊으면 마른논이 되어 보리를 심는 이모작을 하는 논배미는 도랑,개천물이 생명이었다. 따라서 농부들은 가뭄이 들때 도랑물 한방울이라도 논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도랑에 보를 막는다. 보를 막는것을 '보매기'라고 하였는데 보매기는 가을일이 끝난 다음에 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이른봄에 하였다.
보매기는 새로 보를 쌓거나 기존의 보를 더높게 또는 무너진곳을 보강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보매기는 봇물로 농사는 짓는 논주인들이 모두 나와 공동작업을 한다. 지게,삽,괭이,톱,낫등을 들고 나와 일을 하는데 가장 먼저 큰물이 져도 떠내려 가지 않도록 큰돌을 여러사람이 굴려다 보 밑바닥에 깐다. 그위에는 산에서 베어온 소나무를 가로질러 놓고 솔깽이로 부르는 잎달린 소나무 가지를 수북히 깐다음 흙과 자갈을 안쪽으로 채우고 다시 큰돌로 쌓은다음 다시 소나무 기둥과 소나무 가지를 까는걸 되풀이 하는식으로 3단 또는 4단 높이로 쌓는다.
둑이 완성되면 물이 아래로 새나가지 않도록 두텁게 떼를 떠다 보 안쪽 바닥과 보 상단 전체를 빈틈없이 엎어서 깔고 발로 밟고 샆으로 두드려 매끈하고 튼튼하게 만든다. 보매기는 도랑 또는 개천의 넓이와 보의 높이에 따라 크기가 결정되기 때문에 보하나를 막으려면 적어도 며칠이 걸린다.
가물때는 물을 차지하려 홍수때는 물을 버리려 벌인 물꼬싸움
보는 논농사의 생명선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물과 모내기 때부터 날이 가물면 방죽이나 수리조합에서 관리한다하여 수리조합이라고 불렀던 대형 저수지 물을 터 내려보낼때 가두어 논에 봇도랑을 통해 끌어들여 모내기를 하고 계속 물을 대 벼가 자랄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비가 적당히 내려 물이 넉넉하면 물싸움이 벌어지지 않지만 날이 가물면 물을 지키고 빼가려는 농부들 사이에 크고 작은 싸움이 벌어졌다. 일명 보싸움과 물꼬싸움이다.
보싸움은 아랫보에서 물을 대는 농부들이 윗보 봇도랑 물꼬를 막고 봇물을 아래로 터가다 들켜 윗보 사람들하고 싸움이 붙는 것이다. 아랫보 사람들이 몰래 물을 터가버려 논이 말라버린 윗보 사람들이 화가 날건 뻔하다. 가만두면 농사를 망칠 수 있기 때문에 윗보사람들이 아랫보 사람들을 찾아가 심보가 괘씸한 사람들이라며 큰소리를 치게 마련이다.그럴때 아랫보 사람이 미안하다며 용서를 빌지않고 "같이살자"고 악다구니를 쓰고 달려들면 멱살잡이에 끝내 보에 거꾸로 메다꼿기를 하는등 대판 패싸움으로 번지기도 한다.
보싸움이 패싸움이라면 물꼬싸움은 주로 위아래 논주인간 벌어지는 개인싸움인 경우가 많다. 밤에 몰래 봇도랑에서 윗논으로 들어가는 물꼬를 막고 자기논으로 물을 몰아 넣거나 윗논의 물꼬를 파 윗논의 물을 자신의 논으로 빼가 버리면 논이 말라버린 윗논주인과 물을 빼간 아랫논 주인간에 온갖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욕설은 기본이고 논두렁에서 치고 받는 육탄전도 불사한다.
농사의 성패,나아가 가족의 생계가 달린 문제라 물꼬싸움이 붙으면 아낙네들까지 쫒아나와 "썩을놈,죽일놈" 소리와 삿대질로 싸움에 가세하기도 하고 싸움이 격화될 경우 사람이 죽는 살인사건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날이 가물면 농부들은 물꼬를 지키고 물을 빼가기 위해 밤잠을 자지 못했다. 모기에 뜯겨가며 꼭두새벽까지 물꼬를 둘러본다. 논에 나갔다와서도 행여 물을 터가지나 않나 불안하여 다시 삽을 들고 나간다.
아랫논 주인 또한 윗논 주인이 물꼬를 보고 돌아가는걸 지켜보다 윗논 물꼬를 막고 자신의 논으로 물을 집싸게 돌린다. 숨바꼭질 끝에 날이 새면 대낮에는 보는 눈이 있어 물쟁탈전이 덜하지만 낮에 물꼬를 지키는것도 큰일이다. 위아래 논주인들끼리 서로 몇시간씩 물을 대기로 의견을 모아 화합하는 아름다운 물인심도 없지 않았지만 날이 심하게 가물면 그렇게 인심쓰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물꼬싸움은 비가 많이 와도 벌어졌다. 장마나 홍수가 져 논에 물이 넘치면 논둑이 무너지는 방천이 잘 난다. 방천이 나면 논두렁을 다시 쌓아야 하는데 놉을 몇명 얻어도 며칠이 걸리기 때문에 이만저만 고통이 아니다. 따라서 비가 많이 오면 방천이 안나도록 물이 들어오는 물꼬를 막고 물이 나가는 물꼬를 파서 아래로 빼낸다.
이로인해 아랫논에 물이 넘쳐 아랫논에 방천이 나면 아랫논 주인이 자신의 논으로 물을 털어 방천이 났다며 윗논 주인과 물꼬싸움을 벌인다. 가물때와 홍수때 물꼬싸움의 공격과 방어를 주고 받는 것이다. 이처럼 하늘에 농사를 의지했던 지난날에는 가물때는 물을 차지하려 홍수때는 물을 버리려 물꼬싸움이 벌어졌지만 관개시설이 잘 되어있고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한두명의 농부가 마을농사의 대부분을 몰아짓는 요즈음에는 보싸움,물꼬싸움을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