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대한민국과 민족의 상황은 신라의 사대주의로부터 출발하는 과거의 뒤틀림에서 비롯된다
오늘날 해머리땅의 해민족은 민족이 분단되어 있고 북한은 소련의 지원으로 시작된 김일성왕국이 60년이상을 장기집권해 오고 있고, 남한은 미국의 지원으로 시작된 이승만이래로 박정희가 군사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한 이래로 모든 분야의 영남기득권을 구축한 배경으로 김대중정부를 빼고는 우리가남이가 영남왕국이 45년을 장기집권해 오고 있다. 김대중은 호남을 지지기반으로 동서화합과 남북통합을 주도했다. 그러나, 다시 93%로 절대 지지하고 대통령으로 선출했던 호남에 비수를 꽂고 한나라당에 대통령직까지 포기하겠다면서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추진한 노무현의 뒷통수치기로 결국 이명박과 한나라당에게 권력을 넘겨 주고 말았다. 노무현세력의 국민과 민족에 대한 배신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을 정조라며 우상화하는 노무현빠돌이들은 아직도 김대중하야를 요구하고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이 정치선진화를 위해서 필요하다던 유시민 대통령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자주국방과 국민복지노선을 지향한 실학세력을 참모진으로 삼고 우리가남이가 영남노론파의 독점구조악을 무너뜨리려 했던 정조가 어찌 실학파들의 산실인 호남에게 뒷통수를 치고 우리가남이가 영남세력과 대연합을 추진하려던 노무현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말인가! 정조대왕이 되고자 한다면 절대로 썩어빠진 우리가남이가 영남정치꾼들을 참모로 세우지 않으면서 실학노선을 추구하는 인물들을 참모로 참고 개혁을 추진하는 통치자가 될 때에 정조대왕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노무현빠돌이들은 정조대왕의 명예를 욕 보이지 말기를 바란다. 한국의 지식인이라는 자들치고 노무현이 정조에 비견된다는 주장에 대해 비판한 것을 잘 보지 못한 것 같다.
국권강탈과 식민지,그리고 민족의 분단상황의 근원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정조시대까지 올라가 정조대왕을 이해해야 하고, 정조대왕의 정치구조와 누가 정조를 끊임없이 제거하려 했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역사연구의 목적이란 근본적으로 재미나 관심거리로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현재라는 결과를 낳은 과거를 바로 인식하고 그 과거에서 교훈을 찾아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를 열자는데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과거의 뒤틀림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그러한 목적의 역사연구가 아니라면 그냥 자기만족수준의 유희거리에 불과하다.
조선은 정도전의 민본주의(대한민국 헌법1조)에 기반한 통치철학에서 탄생한 나라다
노비출신의 어머니와 아내를 두었던 천민출신 정도전의 민본주의는 고려 기득권세력으로부터 왕따를 당하여 9여년간을 유배와 유랑으로 점철되었던 바, 나주 유배지에서 부패한 고려 정치집단에 대한 호된 농민들의 질타와 비난으로 부터 확고해졌고, 당시 신흥무장세력인 이성계와 손을 잡고 쿠테타로 조선을 열었으며, 국가운영에 있어서 왕이 단독 결정권을 갖지 못하는 것을 전제로 백성들의 여론을 기반으로 삼는 신하들이 국가을 운영해 가는 민본주의 국가건설을 목표로 조선의 헌법과 법률 제정, 그리고 한양천도에 이르기까지 조선건국을 주도했다. 귀족들의 사병제를 해체하여 군대를 국군으로 일원화하여 주인없이 비워진 고토 요동지역을 정벌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병원이 이에 반기를 들고 정도전을 암살하고 왕위에 올라 왕권을 강화하게 되니 정도전의 꿈도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백성을 주인으로 삼겠다는 민본주의에 토대하여 정도전이 만든 헌법과 법률은 조선 500년을 지탱하는 토대가 되었고 이성계의 스승이나 다름없는 정도전은 실질적인 조선창업자로 기록되었다. 우왕의 장인으로서 북벌을 지시한 최영의 명을 어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부분이지만, 정도전 입장에서 보면 당시 권문귀족세력들의 부패가 난무한 고려말기는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지 않고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결단이였을 것이다. 정도전 역시 귀족들의 사병제를 철폐하고 군대를 일원화하여 강한 군대로 육성한 후에 북벌을 단행하려 했다가 이방원에게 암살당한 것이다.
이러한 정도전의 민본주의는 세종임금에 이르러 다시 빛을 발하였다. 지나중심의 천문학에서 조선땅에 맞는 자주적인 천문학을 구축하고 8도 백성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세제를 정리하고 세계최고의 과학적인 문자인 한글창제를 주도하여 백성들의 문맹율을 사라지게 하였다.또한 세계최초의 로켓포인 신기전을 개발하여 여진토벌에 사용하였으며 당시 명나라를 두렵게 만들었다. 세종임금에게는 청백리의 표상 황희가 있었다. 자기집 노비자식들을 자식처럼 대해 줄 만큼 권위적이지 않았던 황희의 욕심없고 단백하고 근검절약스러운 성품이 18년간 오직 백성이 잘 살고 나라 잘 되기만을 바라며 영의정으로 일하게 할 만큼 조선최고의 재상의 반열에 올라가게 하였던 것이다.
세월은 흘러 다시 유럽이 르네상스시대를 맞이할 때 역시 대세와 기운은 조선하늘에도 열리고 있었다. 어린시절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노론(老論)의 일당전제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노론의 정치적 모략에 의해 반정을 도모했다는 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였다.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대왕 그는 누구인가?
정조대왕의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 : 思悼世子)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이다. 비는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정조에게 있어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한다면 노론은 모조리 제거해야 할 정조의 정적들이였다. 그러나 왕위에 즉위한 정조는 코너에 몰린 쥐들이 고양이들을 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속전속결로 나갈 수가 없었고 군대와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노론세력을 단번에 제거하는 일이 쉬울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우선 자신의 권력적 기반과 꿈을 실현해 줄 싱크탱크로서의 최측근 인물들을 필요했다.
왕위에 오르자 바로 효장세자를 진종대왕으로,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존했으며, 세손 때부터 그를 보호한 홍국영(洪國榮)을 도승지로 삼고 숙위대장(宿衛大將)을 겸직시켜 반대세력을 숙청해 정권의 안정을 도모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사주한 숙의 문씨(淑儀文氏)의 작호를 삭탈하고, 화완옹주(和緩翁主)는 사가(私家)로 방축했으며, 문성국(文聖國)은 노비로 만들고,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과 홍인한을 경원과 여산으로 귀양보냈다가 사사(賜死)했다. 홍국영이 세도를 부리며 권력을 남용하자 조신들의 탄핵에 따라 1779년 9월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듬해 2월에는 전리(田里)로 돌려보내 친정체제를 강화했다.
정조는 즉위한 다음날 어제봉안(御製奉安)의 장소로 마련했던 규장각(奎章閣)을 9월에 준공, 역대 왕의 문적들을 수집해 보관하게 하고, 중국에서 보내온 서적을 비롯한 많은 책들을 거두어 수장하게 했다. 1777년 12월 교서관(校書館)을 규장외각(奎章外閣)이라 하고, 1782년 2월 강화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신축했다. 규장각에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 등을 각신(閣臣)으로 선발해 후한 녹봉을 주고 연구에 몰두하도록 했으며, 정조 자신도 이들과 밤을 새워 대화를 나누고 시정(時政)의 득실과 학문을 논했다. 각신의 양성은 당파의 인물을 멀리하고 참신하고 유능한 신진들을 길러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만들려는 의도도 포함된 것이었다. 1779년에는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 등 서얼 출신으로 재주있는 인사들을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했다. 정조는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활자에 깊은 관심을 갖고 1772년 임진자(壬辰字), 1777년 정유자(丁酉字), 1782년 한구자(韓構字), 1792년 목활자인 생생자(生生字), 1795년 구리로 정리자(整理字), 1797년 쇠로 춘추관자(春秋館字) 등 도합 80여 만 자를 만들어 규장각에 비치해 서적 간행에 이용하도록 했다.
정조는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을 실시했다. 아버지 장헌세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