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검사라는 안정된 길을 마다하고 평생을 가난한 이웃과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서 그들의 권리와 이익을 옹호한 조영래 변호사 “남의 불행을 바탕으로 엄청난 돈을 거머쥐는 현실… 조영래 같은 사람이 그립다”
1980년대 중반 서울 망원동에 살 때 이불이 젖고 지하실 연탄이 곤죽이 되는 큰 물난리를 당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믿기지 않을 일인데 당시 북한이 보내온 쌀과 옷감을 구호품으로 받았다.정작 정부로부터는 한 푼의 보상금도 받지 못한 채 이웃 주민들과 함께 서소문에 있는 한 젊은 변호사를 찾아가게 되었다.
당시 법대생이었던 필자는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이 불가항력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서울시나 건설업자에게 홍수피해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는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그런데 이른바 ‘전관’이 아니었던 그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거나 생각했어도 실천에 옮기지 않았던 소송을 제기하였고, 그의 열정과 창의적 발상은 법정에서 유수 및 배수시설에 대한 시공 상의 하자와 관리소홀 책임을 이끌어냈다.
그때 필자는 변호사란 힘없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권력 뒤에 숨어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여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는 좋은 직업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젊은 변호사는 다름 아닌 고 조영래 변호사다.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하는 열악한 근로환경에서 근로기준법이라는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해석해 줄 법대생 친구 한 명만 있었으면 좋겠다던 청년 전태일에게 법대생 조영래는 그의 친구가 돼주었다.
해마다 법원과 검찰 인사가 끝난 3월 이때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일간지 1면의 돌출광고는 변호사 개업소식으로 채워진다. 그 내용도 천편일률이다.어떤 전관들은 심지어 자신이 근무했던 법원과 검찰의 부서까지 소상히 밝히기도 한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근엄하게 법대 위에 앉아 있던 법관이 불과 며칠 사이에 법대를 내려와 변호사로 이 법정 저 법정을 분주히 다니면서 사건 당사자들 속에 파묻혀 있는 모습은 아무리 직업이려니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더욱이 전관 변호사들에게 맡긴 사건의 승소율이 높다는 얘기를 들으면 씁쓸하다.이들의 실력이 뛰어나서 결과가 좋게 나온다는 말도 있다.그렇다면 그 실력이 왜 다음 전관이 나올 때까지 길어야 1년밖에 가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모두 전관예우라는 특혜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아는 한 분은 최고위직 법관을 지낸 후 말없이 1년간 외국에 나가 있다 돌아오셨다.변호사 개업을 하면 수많은 사건이 몰려올 것이 분명한데 자신이 근무했던 법원에 부담 주는 것을 피했던 것이다. 참으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로스쿨 학생들에게 가장 듣고 싶은 소식이 무엇이냐는 설문을 했더니 단연 1위는 취업확정 통보였다. 로스쿨 생들과 사법연수생들은 대형 로펌, 법원,검찰에 들어가기 위해 그야말로 피터지게 경쟁한다. 그러다 보니 로스쿨생 중에서도 검사 임용을 하겠다는 법무부 발표에 자신들 몫의 일부를 빼앗긴다고 생각한 나머지 사법연수생들이 입소식에 불참하고 젊은 변호사들도 이에 동조하여 시위를 벌였다.
법률시장에 취업난이 있다고 하나 구인난이 있는 곳도 있다.예를 들어 장애인단체에서 장애인의 권익을 보호해 줄 변호사를 뽑는다면 경합이 치열하겠는가?그런 자리는 원하면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다.그러나 그들의 변호사가 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변호사라는 직업을 면기난부(免飢難富)로 비유하기도 한다.부자 되기는 어렵고 배고픔은 면할 수 있으니 부자가 되려 하지 말라는 뜻이다.
꿈꾸는 한 사람의 변호사에 의해 세상은 아름답게 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변호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숭고한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변호사가 돈벌이의 수단이 되고,법원 검찰 퇴임 후 유능한 변호사로 변신하여 엄청난 부를 거머쥐는 것이 하나의 공식이 되는 현실에서 변호사라는 직업은 남의 불행을 먹고사는 부끄러운 이름이 되고 만다.
지금도 내게 법대생 친구 하나만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전태일은 우리 주변에 아직도 많이 있다.좋은 향기는 오래 그리고 멀리 퍼진다. <남형두/연세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