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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쯤에 우연한 기회를 빌려서 대덕연구단지 안에 있는 실험용 원자로를 구경하게 되었다. ‘하나로’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한국 최초의 다목적 연구용 원자로였다. 비록 연구를 목적으로 건설한 소규모 원자로일지언정 엄연히 원자로다. 같이 구경 간 일행들 모두가 내켜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내빼면 지는 거”라는 일종의 치킨게임 심리가 알게 모르게 작용한 탓에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건물 내부로 들어가고 말았다.
세 가지 기억이 특별히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첫째는 대덕연구단지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 둘째는 그 먼 대전까지 낡고 비좁은 봉고차를 타고 내려갔다는 것, 마지막 세 번째는 원자로 내부에서 연소될 연료봉을 보관해놓은 거대한 수조에 채워진 물의 색깔이 너무나 아름다웠다는 것. 그것은 더 이상은 맑고 투명할 수가 없을 순수하고 매혹적인 코발트빛이었다.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생게망게 피어오르는 거였다. 난간이 유난히 튼튼하게 설치된 점으로 미루어보아 나만 그런 유혹에 휩싸이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누군가 장난기가 발동해 저 물에 빠지면 어떻게 되느냐고 그곳 관계자에게 물어봤더니 하도 유치하고 어이없는 질문이었던지 아예 대답조차 하지 않더라. 관계자는 직접적인 답변 대신에 “어떤 일이 있어도 저 물은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좌중의 기를 순식간에 죽여 놨다.
그때 봤던 코발트색 물을 주제로 비즈니스 센터의 실장님과 잠시 얘기를 나누고서 나는 결론을 박듯이 덧붙였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겉모양이 아름다운 것일수록 속에는 맹독을 품고 있기 마련입니다. 실장님 같은 젊은 분들은 이 점을 특히 잘 유념하셔야 나중에 살면서 큰 낭패를 당하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의 아름다움이 비단 외모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노무현-유시민 유형의 청산유수의 언변과, 이건희-이재용 부류의 두툼한 돈지갑도 순진한 사람들을 홀려 결국에는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예쁘고 그럴싸한 포장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파괴된 원자로와 사투를 벌이는 이들이 사실상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고 한다. ‘순직’이니 ‘옥쇄’니 ‘가미카제’니 하는 비장하면서도 살벌한 단어들이 언론에서 공공연하게 회자되기 시작했다. 대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일본인들에게 동정이 가면서도, 무리하게 원자력 발전에 의존해온 그들 나라의 정부와 기업들이 한편으로는 내 마음속에서 막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허나 핵발전소 덕택에 편안한 삶을 누리기는 우리나라 또한 바다 건너 이웃나라와 마찬가지인 터라 켕기는 구석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한 평 반 남짓한 면적의 내 사무실만 해도 전기로 가동되는 기계장치들이 벌써 몇 개인가? 컴퓨터 풀세트에, 전화기에, 가습기에, 소형 온풍기에, 휴대전화 충전기에, 게다가 박스에 넣어둔 작은 선풍기까지. 천장의 형광등들은 물론 뺐다.
실장님은 방사능이란 소리에 정말로 본능적인 반응을 보였다. “무서워 죽겠어요!” 그게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들의 평균적 심리일 게다. 방사능 낙진과 관련된 사이버공간의 유언비어 단속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닌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는 한 인간을 판단할 때 용모나 스펙 등의 허울 좋은 외양에 현혹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현실정치의 수준에서는 책임감 없이 혀만 잘 굴리는 선동가형 사기꾼들을 경계하며, 국가적 차원에서는 푸르른 물속에서 죽음의 재로 변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핵연료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지속가능한 경제구조를 만들어가야겠다.
방사능 물질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정치평론이고, 정권창출이고 솔직히 별로 할 맛이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금년 식목일에는 야외로 나가 사과나무 한 그루를 꼭 심어야 할 듯싶다.
출처:수복(본 칼럼은 유료칼럼이므로 무단전재 퍼가기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