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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와 차별을 천형처럼 짊어지고 살아온 전라도
전라도는 차별을 천형처럼 짊어지고 살아온 한과 눈물의 땅이었다.553년 백제 성왕시절 신라 진흥왕의 약속 위반으로 120년동안 지속되어온 나제동맹이 깨지면서 원수지간이 된 것을 계기로 백제의 주요 영역이었던 전라도와 신라의 중심영역이었던 경상도 사이엔 갈등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하면서 신라에 복속된 전라도는 신라로부터 온갖 냉대와 차별을 받는 노예의 땅으로 전락하였다.이처럼 통일신라때 태동한 전라도에 대한 경상도의 기득권,패권적 우월주의에 입각한 가해자적 일방적,공격적 지역감정과 이러한 경상도에 대응한 전라도의 피해자적 생존차원의 방어적 지역감정은 사사건건 부딪치면서 갈등의 골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경상도와 전라도간의 영호남 지역감정은 신라가 망한이후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을 뿐 아니라 전라도 이외 지역민의 전라도에 대한 호남차별이라는 지역 차별주의를 배태시켰다. 고려 태조 왕건이 죽은 지 80년이 지나서 ‘고려사’를 다시 편찬할때 고려 개국에 결정적 역할을 하여 고려 조정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했던 전라도계를 축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작하여 신라계 최항(崔沆)의 집에 간직해 두었던 훈요십조를 경주출신의 최제안(崔齊安)이라는 인물이 꺼내와서 왕건의 유서라고 하며 실록에 끼워 넣은게 공식적인 역사기록으로 남으면서 호남차별의 멍에가 되었다.
훈요십조에 의해 전라도계가 고려 조정에서 퇴출된 이후 경상도 출신들이 고려-조선-현대에 이르기까지 지베새력으로 군림하면서 호남에 대한 경상도의 일방적,공격적 지역감정이 당연시되었다. 이러한 경상도계 지배계층과 영합하여 지배세력으로 군림한 비호남 지역까지 호남에 대한 인간적 신뢰,인격과 관련된 거짓말쟁이,사기꾼,아첨꾼등 극히 부정적인 편견,고정관념에 바탕한 호남차별주의를 일반화하였다.
외국인보다도 못한 이등국민 인간적 불신,모멸과 정치,경제,인사,사회,문화적 차별앞에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을때 초개같이 몸던졌던 삼별초와 함께한 대몽항쟁,임진왜란과 구한말 구국투쟁등 호남인이 피흘린 구국항쟁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이처럼 1400년동안 한민족의 일원이면서도 동족으로부터 이방인과 다름없는 차별과 설움을 겪어왔던 전라도 사람들의 한이 어느정도 풀린건 전라도 출신의 김대중 정권이 집권하면서였다.
놈들은 전라도 딸 장자연을 노리개 삼아 죽음으로 내 몰았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 등장으로 어느정도 한의 응어리가 풀어졌던 전라도 사람들에게 반호남 감정에 반 김대중 정서로 겹 무장한 경상도를 기반으로 집권한 이명박정권은 정치,인사,경제,행정등 국정 전반에 걸쳐 경상도 독식 인사,낙동강 쏟아붓기 예산 싹쓸이등 경상도 패권적 통치에 호남인사 퇴출,금호아시아나 및 대주조선등 호남기업 죽이기,호남 예산홀대등 지역 차별적 정책으로 전라도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고 있다.
이러한 이명박정권의 전라도에 대한 홀대와 차별은 전라도 사람에대한 현대판 노예화라는 어떠한 이유로도 감당할 수 없는 모욕과 능멸적 현상을 전라도 출신 故 장자연씨 사태를 통해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장자연씨 사건은 전라도 정읍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광주에서 대학을 거쳐 대학원에 재학중 연예인의 꿈을 안고 상경한 그녀가 채 꿈을 이루지도 못하고 2009년 3월7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자신의 집에서 목을 매 숨지면서 비롯되었다.
장자연씨는 살아서는 소속사 사장을 비롯한 연예계를 좌지우지하는 연예권력자와 이러한 연예계와 직간접적으로 추악한 공생관계에 있는 언론,문화,금융,방송권력자들의 철저한 노리개였다 .그녀는 죽어서도 정치권력과 언론및 방송권력간의 정치공학과 이해공학에 희생된 노리개였다.연예인으로 성공하겠다는 꿈을 고리삼아 놈들은 술접대와 성상납이라는 육욕적 쾌락을 위한 노리개로 짓밟아 죽음으로 내몰았고 죽은지 2년이 지난 오늘날엔 편히 잠들지 못하고 있던 영혼까지 무덤에서 불러내 정치이해공학의 노리개로 난도질하는 부관참시를 가하였다.
전라도 여성 장자연씨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놈들의 노리개에서 벗어나지 못한 생전사후 노리개 삶을 들여다 보면 처참하다.장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당시 처음 유서가 발견되지 않아 단순자살로 처리됐으나 장씨 자살이후 전 매니저 유모씨에 의해서 숨지기 직전에 쓴 리스트가 명시된 자필문건이 공개되면서 그녀의 죽음이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큰 파장이 일었다.
당시 '장자연 문건'으로 불렸던 문제의 문건에는 장씨 자신의 주민등록번호와 서명 등이 적혀 있었고, 기획사로부터 술접대와 성상납 강요를 받는 등 폭행에 시달려왔다는 내용과 함께 자신이 술접대와 성상납을 한 언론사 대표, 방송사 PD, 기업체 대표 등의 실명을 적어 놓았다.
술접대,성상납의혹이 드러나면서 연예인 지망생들을 접대에 이용하는 기획사의 인권 유린과 불법성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쏟아졌다. 특히 유서에 적혀진 유명인사들의 실명에 대한 의혹이 일파만파로 번져 나가자 당시 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국회에서 장씨 문건에 명시된 조선일보의 고위 임원의 실명을 전격 공개하면서 조선일보가 이에 반발,이의원의 폭로를 공개한 KBS와 MBC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등 법정다툼으로 비화되기까지 하였다.
국민들은 장씨 자살로 드러난 연예인들에 대한 성상납과 술접대 강요등 인권유린과 불법,관련인사들의 부도덕한 일탈 행위에 대해 한점 의혹없는 실체규명과 법적 처벌이 이루어지길 기대했지만 경찰은 40여명의 수사전담반을 가동, 4개월간 600여명의 참고인을 조사하는 등 요란을 떨었을뿐 유력인사들에 대한 수사는 어물쩍 넘기고 말았다.
경찰이 '장자연 문건'에 거론됐거나 유족에 의해 사자명예훼손 등 혐의로 고소당한 언론사와 금융사 대표 등 20명을 기소의견으로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송치하였지만 일본으로 도피하였다가 구속되었던 사건 핵심인물인 소속사 대표 김성훈은 보석으로 풀려났고 문건을 세상에 알린 유장호는 모욕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으나 기각되었다.
술접대와 성상납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국민적 관심이 쏠렸던 유명인사 18명에 대해선 내사종결(7명)·불기소(6명)·불구속(5명) 처리해 면죄부를 주었다는 부실수사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결국 검찰은 2010년 지난해 8월19일 소속사 전 대표 김씨와 전 매니저 유씨만 폭행과 명예훼손 등 혐의로 불구속기소하고 나머지 유력인사들은 증거부족 등을 이유로 혐의없음 처분했고 재판에 회부된 김씨와 유씨에게 법원이 유죄를 인정, 각각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160시간의 사회봉사명령을 내린 것을 끝으로 장자연 리스트 사건은 발생 20개월만에 유야무야 일단락됐다.
SBS의 국과수 발표 수용과 조선일보의 반격
이처럼 법적으로까지 마무리된 사건을 SBS가 3월6일 저녁 8시 뉴스를 통해 2009년 ‘연예계 성접대 비리’를 폭로하고 자살한 장자연(29)씨가 숨지기 전 지인에게 보낸 50여통의 편지를 단독 입수했다며 “연예계와 대기업 등의 남성 31명에게 100번 넘게 접대를 했다”고 보도했다.이로써 국민들 뇌리에서 잊혀져 가던 이 사건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큰 파장을 예고하였다.그러나 이러한 SBS의 폭로보도는 태산명동서일필로 끝나고 말았다.
경찰이 SBS 보도 이후 '장자연 편지' 건에 대한 수사에 재착수, 지난 9일 장씨의 지인이라고 주장한 광주교도소 수감자 전모(31)씨의 감방을 압수수색해 장씨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 23장을 확보해 국과수에 필적 및 지문감정을 의뢰한 것이다.이에 대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3월16일 “장씨 친필이라고 주장되던 편지 원본은 장씨 필적과 ‘상이한 필적’이고, 이 필적과 광주교도소에서 전씨로부터 압수한 적색의 필적은 동일 필적인 것으로 밝혀졌다”며 사실상 가짜라고 판정하였기 때문이다.
필적감정과 관련하여 양후열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문서영상과 과장은 “원본편지와 적색필적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