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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폭군 모본왕을 끝으로 해씨 왕통이 단절되고 6대 태조왕을 시작으로 고씨 왕통으로 바뀌게 된다고구려 대무신왕이 부여여인(동부여 금와왕의 막내아들이 세운 갈사국왕의 손녀)을 후비로 취하여 낳은 영리하고 용맹한 호동왕자가 왕위에 오를 후계자였는데, 아들을 낳지 못하다가 뒷늦게 아들을 낳았던 대무신왕의 왕후는 자신의 아들(훗날 모본왕)이 왕위에 오르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위기의식을 느끼고 호동왕자가 자신을 겁탈했다고 거짓말을 하여 호동왕자를 음해하였고 결국 자결로 자신의 결백함을 보인 호동왕자를 죽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모본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니 결국 그 화가 아들에게 왔다.즉, 포악하고 기고만장했던 모본왕이 민심을 상실하고 마침내 최측근 두보에게 암살당하고 만 것이다.그 모본왕을 이어 해씨 왕통이 단절되고 고씨계로 왕통이 이어지는 6대 태조왕이 오르게 되는 것이다.
만약 호동왕자가 고구려 왕에 직위했다면 고구려는 더욱 강성해졌을 것이고, 해씨에서 고씨로 왕통이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음해당한 비참한 죽음이란 잘 생기고 영리하고 용맹했던 고구려 호동왕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통치철학과 비젼도 갖추지 못했으면서 권력욕에만 눈이 멀어 개폼잡는 인간들이여! 권력을 탐하지 말라! 그대들 때문에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들의 이름은 고구려의 폭군 모본왕처럼 역사에 추하게 기록될 뿐이다.
해(고)씨 중심의 KOREA(고리)족은 22대 색불루 단군천황 때 단군조선의 황통을 장악한다
대한민국을 외국인들은 KOREA라 부른다. 아라비아와도 해상무역을 했던 중세시기 고려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국호가 되었다.그런데 KOREA는 바로 단군조선의 봉후국이였던 고리국에서 유래하며 고려까지 이어진 것이다. 고리국의 고씨족이 단군조선의 황통을 장악한 시기는 22대 색불루 단군천황시기다. 우리가 흔히 단군조선이라 불리우는 국호는 색불루가 단군천황에 즉위한 후에 바꾼 국호(조선)다. 색불루는 고등의 손자로 수유족장 서우여의 권력장악시도를 제거하고 단군천황에 올랐다. 반항하던 서우여는 번조선 단군직 제안을 수락하고 번조선의 단군에 오르게 되니 그 때부터 번조선은 기자조선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그 때 기자奇子의 의미는 해의 아들이라는 의미다. 물론 은나라가 망한 후에 번조선지역으로 망명해 온 은나라 왕족 기자箕子 이전의 내용이다.
고씨족은 해씨족이다. 해(고)씨족의 나라는 고리족으로 단군조선 당시에는 요하 상류지역(내몽골 임황지역)에 위치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1대 왕은 초대 단군천황의 차남 부소였다. 그래서 고리국은 단군천황의 막내아들 부여가 1대왕으로 임명된 부여국과 함께 봉후국(단군천황의 자식들이나 친척들이 왕으로 임명된 제후국)이였다. 그리고 고대 지나사에 등장하는 고죽국 또한 해(고)씨족의 나라로 노동와 근검절약을 중시하고 만민평등을 추구했던 묵자는 지나사상사에서도 빼 놓을 수 없는 고죽국이 낳은 위대한 사상가였다.그래서 지나인들은 고죽국을 고구려와 동일시하여 기록했다. 고구려가 외교문서에 기재한 정식국호는 선조의 나라국호를 그대로 사용한 '고리'다. '고리'가 한자어로 표기하니 고려가 된 것이다. 고씨의 나라다보니 고고리(고구려/까오리=지나인들의 발음)가 된 것이다.
해민족의 광명사상에서 나온 성씨가 '해'씨로써 한자로 표기하면 '고'씨가 된다.따라서 두 성씨가 다른 성씨가 아니다.
고대로부터 밝은 것을 추구하는 해민족은 아침에 떠 오르는 해(태양)을 상징으로 삼고 절을 하고 밤에는 달에게 절을 하였다. 단군족의 갈래인 흉노족의 풍습도 아침 저녁에 해와 달에 절을 하였다. 해는 한자로 표기하면 태양이다. 태양은 높은 하늘에 떠 있기 때문에 높을 '고'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해는 '환''한'으로도 표기되며,지나에서는 '간', 몽골에서는 칸, 중동지역에서는 안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해=고=환(=한=간=칸=안)=색=불/밝다에서 박씨가 나오고, 역시 해처럼 밝게 빛나는 황금숭배신앙에서 김씨가 나온 것이다. 이런 말들은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진 용어인 것이다.
단군조선의 47대 단군천황의 성과 이름은 고열가다. 그리고 고열가의 친척으로 부여를 개국한 인물은 해모수다. 해모수의 둘째 아들은 고진이다. 22대 단군천황의 성과 이름은 색불루이고, 색불루의 할아버지는 고등이다. 해모수의 손자로 동부여를 세운 인물은 해부루이고, 역시 친손자로 고구려를 세운 인물은 고추모다. 그리고 고추모의 아버지는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진의 손자인 불리지로 고모수라고도 불리운다. 소서노의 첫 남편 우태는 해부루의 손자이기 때문에 해우태이고 우태의 아들 비류와 온조 성씨 또한 해씨가 되는 것이다. 자, 이렇게 혈통이 같은데 할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손자의 성씨들이 해씨와 고씨로 기록되어 해씨와 고씨가 다른 성씨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로 고등.색불루.고열가.해모수.고진.불리지.고두막.고무서.해부루.해우태.해추모.해비류.해온조는 모두 동일혈족인 것이다.
용맹함으로 고토회복에 힘썼고 민생을 잘 살펴있으며, 관용과 덕이 컸던 고구려 태조왕은 왜 고구려 국조왕이 되었나?
보통 지나사나 한국사에서 처음 나라를 세운 인물들에 부여되는 용어가 '태조'다. 그러면 고구려의 태조는 마땅히 고추모가 되야 한다. 그런데, 왜 고구려에서는 '고궁'을 태조왕이라 칭하고 기록했던 것일까? 그것은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왕통이 바뀌게 되는 '고궁'이라는 인물이 고구려왕통을 이어 갔던 계루부 입장에서는 개국왕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치세에 있어서도 해(고)추모의 다물정신의 유지를 받들여 단군조선의 영토를 침식해 들어 오는 한나라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상실한 영토를 회복하였고 국가의 기반을 굳건히 했다는 차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태조왕 '고궁'은 어머니가 부여여인으로 2대 유리왕의 첩이다. 고구려는 5부족으로 운영되는 나라였는데, 왕비를 배출하는 절노부를 제외한 왕족에 해당하는 소노부.계루부.절노부.관노부 등 4부족의 부족장을 고추가라 하였다.
태조왕의 아버지는 계루부의 고추가로 이름은 재사로 2대 유리태왕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태조왕은 유리태왕의 손자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해씨와 고씨가 다른 성씨라고 이해해서는 안 되는 같은 고리족의 성씨임을 전제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계루부는 고씨 성을 취했던 모양이다. 부여에서 남하하여 환인지역에 정착한 고구려 초기 고추모나 유리에게 지지기반이 약하였다. 그래서 고추모나 유리왕 모두 부족세력을 완전히 복속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유리왕은 5명의 여자들과 혼인을 했는데, 여자들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고려태조 왕건처럼 많은 세력을 자신의 지지기반세력으로 만들기 위한 정략결혼이였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태조왕의 아버지 재사는 유리왕과 자화녀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태조왕의 어머니는 부여여인으로 태조왕이 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성인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을 하여 부여태후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