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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 사극 < 근초고왕 >에는 백제가 국모로 삼았던 소서노 사당이 자주 등장한다. 신년을 기념하는 제사를 지낼 때도, 왕실에 불상사가 있을 때도, 태자를 새로 세울 때도 소서노 사당이 어김없이 등장하고 있다.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왕이나 왕후가 그 곳을 찾아 국태민안을 빈다.
이런 설정은 일정 정도는 역사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 삼국사기 > 권23~27 '백제본기'와 권32 '제사' 편에 따르면, 백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제사는 천지신명(3신 광명 하나님)에 대한 제사, 다음은 동명왕에 대한 제사, 그 다음으로는 소서노에 대한 제사였다. 백제인들은 천지신명·동명왕·소서노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이미 백제 초기에 천지신명을 위한 제단과 동명왕·소서노를 위한 사당을 각각 세웠다. 이 외에도 여러 종류의 사당이 더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온조가 나라'십제'를 세우고 가장 먼저 건립한 동명왕의 사당을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사당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1922년 지나국 낙양(뤄양)에서 발견된 천남산묘지명(泉男産墓誌銘)에 기록된 바와 같이 백제인들이 추모한 동명왕은 고구려 시조가 아닌 부여 시조였다. 백제의 뿌리가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 시조를 추모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흑룡강 지역의 탁리국에서 송화강을 건너서 부여로 망명했던 고두막(탁리국왕의 아들이나 시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났고 능력이 출중하여 왕권을 노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 탁리국왕이 죽이려 했던 모양이다)으로 한나라가 부여를 침략해 왔을 때 의병 5천으로 물리치고 부여의 영웅이 되었던 인물이다. 고두막은 민심을 등에 업고 당시 해모수 왕조의 단군이 되려 했던 해부루로부터 부여왕권을 접수했었다. 고두막에게 부여왕권을 물려 준 해부루는 부여의 제후가 될 것을 맹세하고 무리를 이끌고 연해주지역으로 가서 나라를 세우니 가섭원 부여로 동부여라고 칭하였다.
고구려가 부여의 동명성왕 신화를 수용하여 고추모를 동명왕이라 칭했던 배경에는 고추모가 동부여에서 부여로 망명하여 소서노의 아버지 고무서 단군천황의 유언에 따라 부여7대 단군에 즉위하여 부여왕위를 계승했다는 정통성때문이고 동명성왕 고두막과 고추모의 출생과 고난의 인생역정이 같기 때문이다.
비류(어하라).온조세력(십제)을 통합하여 백제를 개국한 시조가 바로 이 동명왕의 후예라고 기록된 부여왕 구태인 것이다.지나문헌에는 어질고 신의가 돈독한 구태가 후한의 요동태수 공손탁의 사위가 되어 후한말에 요동태수이자 구태의 처남이였던 공손강이 고구려의 후미를 공격하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 대방땅으로 이주할 때 부여의 무리를 이끌고 대방의 옛땅(황해도)에 백제를 개국하고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동이강국(대백제)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서.북서 등 지나문헌에 백제는 개국시조를 구태로 삼고 1년에 4번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 배경이라 할 것이다.
부여6대 고무서 단군천황의 차녀로서 고추모가 부여의 단군천황에 직위하였을 때 부여인들의 반대로 남하하여 환인지역에서 고구려를 개국할 때 도왔던 소서노 고추모와 혼인하기 전에 해부루의 손자로 사별한 우태(첫 남편)가 있었다. 이 우태로 부터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소서노는 왜 여걸로 추앙받고 있는가? 그것은 고추모를 도와 고구려를 개국하였고, 동부여에서 고추모의 아들 유리가 아버지를 찾아 오자, 서로 피를 흘리는 고구려의 권력내분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비류.온조를 데리고 요동지역(요하 하류 동쪽)에 정착하여 10년간 무역을 하여 부를 쌓고 어하라를 세워 이를 고추모에게 알리고 자신을 낮추어 고구려의 제후국이 되겠다고 하였기 때문이다.(환단고기)
비류가 어하라 왕에 오르자, 무리들이 비류를 따르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는 비류가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고구려 권좌에 탐이 나서 동족이였던 고구려의 왕위에 오른 유리에게 칼을 겨누고자해서일 것이다. 비류가 어하라왕에 오르자 온조는 인천으로 들어와 서울한강지역에 '십제'를 세우고 마한의 제후국이 되었고, 금강지역의 마한까지 정벌하여 마한연맹체의 강국이 되었다. 소서노는 어하라 백성들이 비류를 따르지 않자, 비류를 설득하여 마한연맹체의 강국이 되어 있던 온조와 합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소서노와 비류는 인천 소래포구로 들어와 머물면서 온조에게 통합을 하자고 설득작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비류세력에게 권력을 빼앗길까봐 두려웠던 온조의 신하들의 반대로 협상이 어렵게 되자, 소서노가 반대한 세력을 제거하고자 맥인들(비류무리-'삼국사기'에는 호랑이로 비유하여 기록)을 거느리고 한성으로 침투하는 과정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고, 온조는 어머니의 죽음에 죄책감과 함께 민심의 동요때문에 불길하다하여 잠시 나라의 도읍지를 이전했던 것으로 보인다.(삼국사기)
세계사에 유례없는 위대한 여걸이며 백제의 국모 소서노의 죽음을 시사하는 기록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조에 이렇게 나온다. "왕도에서 늙은 여자(소서노)가 사내로 변하고 다섯 호랑이가 입성하니 61세의 왕모가 사망했다. (春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훗날 온조를 정통성으로 내세우면서 백제사를 기술한 사가들이 비류세력을 대변했던 소서노를 그렇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에는 비류세력은 온조세력으로 통합되고 비류와 온조와의 통합에 힘쓰다가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소서노를 비류.온조세력의 통합구심으로 삼아 국모로 추모해 온 것으로 보인다.
두 아들 비류와 온조의 통합을 꾀하다가 안타깝게 죽은 소서노의 정신은 고구려와 백제라는 동족끼리의 전쟁을 거부하고 자기를 낮추어 먼저 양보함으로써 화해와 협력을 통하여 통합하여 큰 나라와 민족을 건설하고자 했던 대국주의자로서 오늘날 6.15민족합의를 이끌어 낸 우리 해민족의 평화적인 민족통일에 있어서도 크게 교훈삼아야 할 민족의 여장부가 아닐 수 없다 할 것이다.
권력욕이 눈이 먼 여성이였다면 어찌 두 아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서 장사를 10년이나 하면서 나라세울 생각을 할 수 있으며 나라를 세운 후에도 고추모에게 알려서 고구려의 제후국이 되겠다고 하겠는가? 자신이 헌신하여 개국한 고구려의 권력을 두 아들에게 주겠다고 했다면 고추모세력과 피터지는 권력투쟁을 벌였을 것이고 고추모와 유리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소서노는 그러한 권력투쟁은 고구려와 원수가 된 주변의 부여.동부여와 함께 만주를 노리는 한나라만을 이롭게 하는 분열책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더 큰 나라와 민족건설을 위해서 동족상잔을 피하고 스스로 양보하여 고구려를 떠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남성 정치인들도 쉽게 결단할 수 없는 위대한 통합의 리더쉽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자기패거리주의로 자본과 언론을 장악하여 자신들을 미화시키고 정당화하고, 음해와 지역분열책 등 지나인들이 사용하는 '이이제이'까지 동원하는 등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과 기득권을 독차지하겠다는 우리가남이가 영남정치세력이 높이 떠 받들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서노와 같은 통 크고 서로가 윈윈하는 홍익노선으로 대국을 꿈꾸었던 인물이 있었으니 우리가남이가 정치세력이 지금까지 음해하고 비난하고, 존경심도 없으면서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김대중도 원수같은 자신의 적대세력을 통 크게 용서하고 동서화합노선을 지향했고, 6.15민족합의로 남북통합을 지향했다. 김대중에게는 오로지 큰 나라와 큰 민족을 실현하는데 자신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김대중의 동서화합노선은 여지없이 민주당을 깨 버리고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추진한 노무현에게 뒷통수치기를 당했다.민족민주세력의 타도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세력은 결코 연대의 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국민은 이미 그들을 선거에서 심판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의 동서화합노선은 오로지 김대중의 정치노선과 비젼에 동의하고 따르고자 하는 영남정치인들의 자발적인 영남패권주의 정치을 거부하고 영남패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