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석에 새겨진 오누이의 사랑!
▲ 천전리각석에 새겨진 명문 ▲ 천전리각석의 두 주인공(밝은걸로)
1970년 12월. 울산광역시 울주군에서 발견된 천전리각석. 국내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이자 청동기시대와 신라시대의 기록이 공존하는 유일한 유적으로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원명(原銘)과 추명(追銘)으로 구성된 300여 자의 명문은 고대 신라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됐다. 학자들은 그 안에서 오누이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발견했다.
우매(友妹)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각석에 새겨진 우매(友妹)라는 글자
각석에는 사부지갈문왕이 누이인 어사추여랑을 데리고 이곳에 놀러왔다고 적혀있다. 어사추여랑은 [우매(友妹)]로 지칭되고 있는데, 친구이자 누이라는 뜻의 우매(友妹)는 사촌 남매 정도의 가까운 친족이면서 혼례를 약속한 여성을 뜻하는 말로 추정된다! 현대의 법률이나 가치관으로는 허락되지 않는 금단의 사랑. 그러나 고대 신라 왕실에서 근친혼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신라시대에는 근친혼이 성행했을까?
왜 근친혼인가?
▲ 일본 왕조의 근친혼
근친혼의 풍습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나라, 바로 일본이다. 일본 민법은 삼촌 이내의 혈족에 대해서만 근친혼을 금하고 있다. 실제로 간 나오토 일본 총리는 사촌 누이와 결혼했으며, 왕실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근친혼이 관례처럼 여겨져 왔다. 신라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고려시대, 그리고 신라시대의 근친혼 사례를 통해 오누이가 부부가 되고, 삼촌과 조카가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사랑과 권력을 둘러싼 천전리 각석의 결말은?
▲ 사부지갈문왕과 법흥왕 ▲ 사부지갈문왕과 지소부인의 가계도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를 했던 사부지갈문왕과 어사추여랑. 그러나 오누이의 로맨스는 순탄치만은 않았다.525년, 사부지갈문왕이 천전리각석에 원명을 새긴 데 이어, 539년에는 바로 그 옆에 추명이 새겨진다. 추명을 새긴 사람은 다름 아닌 사부지갈문왕의 부인, 지소였다. 지소부인은 법흥왕의 딸이자, 사부지갈문왕의 조카다.
사랑하는 누이 어사추여랑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조카와 결혼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그리고 어사추여랑은 어떻게 되었을까?사랑과 권력 사이에서 위기를 맞은 천전리 로맨스의 결말을 KBS역사 스폐셜제작진이 추적했다.
300여 자의 명문에 새겨진 신라 왕조의 비밀
▲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각석(국보147호)
천전리각석의 원명과 추명을 통해 살펴본 고대 신라의 사회상. 300여자에 불과한 두 개의 명문은 우리에게 신라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왕실 내부의 근친혼 사례, 신라의 정치구조, 왕과 신하의 관계 변화 등등. 짧은 명문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신라시대의 사회상은 1,500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천전리각석을 통해 전해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유물일지라도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신라 근친상간제도의 배경과 신라왕족의 실체는 누구인가?
일본은 법으로 근친상간을 인정하지만, 조선의 유교국가를 거친 대한민국은 법으로나 성윤리적으로 의학적으로도 열등한 민족을 만드는 근친상간을 혐오하고 배척한다. 본관이 같다면 절대 혼인하지 않는 것이 병에도 건강하고 뇌도 우수한 우수한 유전인자를 가진 나라와 민족만들기에 동참하는 길이다.
신라시대에도 신분제인 성골, 진골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친척끼리 혼인하는 골품제도로 왕통을 이어갔지만,유럽의 어느 한 왕가에서 유독 바보들이 많아 우생학자들이 연구를 해본 결과 가까운 혈족간의 결혼인 근친상간이 원인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런 신분을 증명하는 제도가 개에에도 전수되어 이른바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생산이 되고 있는데 그 순종이 열등인자를 보유하여 각종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근친상간은 유전학적으로 열등한 유전인자를 생산하고 면역력을 약화시켜 병 걸려 죽을 확율이 높다고 한다. 유전자가 열등하다는 것은 태어나도 유약하고 병에도 약하여 사실 쓸모없는 인간이 된다는 의미와 같다. 이런 열등유전인자를 가진 인간들이 우리가남이가하면서 혈족패거리주의로 권력을 잡게 되면 국가를 운영함에 있어 판단능력이나 대응능력자체가 부재하여 위기에 몰렸을 때 쉽게 외세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심리적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근친상간까지 하면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고대인들의 처절함이 느껴 진다.여자들은 부모의 권유에 따라 작은 아버지하고도 결혼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진흥왕은 법흥왕의 친동생(갈문왕)과 갈문왕의 친조카(법흥왕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또한 가야출신 김유신이 신라왕족이 되기 위해 자기 친여동생과 김춘추 사이에서 낳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