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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정치평론가 폴 라인엄(Paul Lyneham)은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가를 운영하는 일을 공인회계사의 대형 업무 정도로 생각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과장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당신은 카리스마를 지닌 회계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 ‘카리스마의 역사(A History Of Charisma)’에서 인용 (도서출판 더숲 발행 / 존 포츠 지음 / 이현주 옮김)
‘정당정치의 파괴’와 ‘생활정치의 득세’는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붙어 다니는 관계다. 게다가 정당정치의 파괴와 생활정치의 득세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을 사람들을 확실하게 안심시키려는 듯이 발(足) 하나까지 보태지면서 나름대로 안정된 정립(鼎立) 구도를 형성하였다. 문제의 발은 바로 ‘원내 중심주의’다. 모든 정치적 에너지와 가능성이 의회(국회)공간 안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논리다.
나는 한국정치의 후진성을 비판하는 정치학자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꿀밤을 한 대씩 때려줘야겠다고 느끼곤 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후진성을 극복할 해법으로 제안하는 세 가지 대안들은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남아돌아갈 만큼 활발하게 실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안이란 방금 언급한 내용들이다. 탈 정당정치 도모, 생활정치 실현, 원내 중심주의 정착.
진보적 정치학자들일수록 더욱더 생활정치를 강조하는 추세다. 그러나 그들은 생활정치의 득세가 정당정치의 파괴로 이어지는 객관적 현실만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원래 그게 학자들의 생리다. 주장만 늘어놓고 책임은 지지 않는….
요즘에는 덩달아 관료들마저 주장만 늘어놓지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분위기이다. 학자와 관료를 나누는 간발의 차이라곤 교수와 학자는 외국에서 베껴온 이론들을 암송하고, 공무원들은 윗선이 지시하는 사항을 충실하게 읊는다는 것뿐. 둘 다 앵무새만도 못한 영혼 없는 족속들이기는 마찬가지다.
지금부터 좀 어려울 수도 있는 이야기가 시작되니 잘 들어보시라. 어렵다기보다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어긋난다고 하는 편이 오히려 사실에 부합할 테지만.
손학규 씨는 민주당 당대표에 선출된 이후로 아주 잠시 ‘반짝 상승세’를 탔다가 곧바로 급전직하, 도리어 투명인간이 되고 말았다. 미친 존재감의 반대말로 불리는 이른바 ‘미친 무존재감’에 시달리는 신세인 것이다.
똑같은 무존재감을 과시(?)할지언정 정세균 씨의 무존재감보다는 손학규 씨의 무존재감을 우리는 주의 깊게 톺아볼 필요성이 있다. 정세균의 무존재감은 그야말로 본인의 능력 탓이고, 손학규의 무존재감은 한국정치의 구조적 모순이 낳은 필연적 결과물인 이유에서다. 즉 “정당정치의 파괴 생활정치 득세 원내 중심주의 확립=투명인간 손학규”인 셈이다. 바꿔 말하면 봉하마을 능참봉 노릇을 자처하는 헛발질을 굳이 자초하지 않았더라도 손학규 씨는 미친 무존재감의 나락으로 어차피 떨어졌으리라는 것이다.
‘양민’들은 요 대목에서 매우 헷갈릴 수도 있으리라. 원내 중심주의는 정당정치의 파괴가 아닌 강화로 이어져야 맞는 게 아니냐면서 물음표를 던지고픈 충동을 억누르기가 매우 힘이 들을 게다. 허나 명심하자. 원내 중심주의는 경우의 수에 따라 그 가치 평가가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일 따름임을. 그것은 정당정치에 플러스적 요소가 될 수도 있고, 마이너스로 작용할 수도 있다. 문자 그대로 Case by Case라고 하겠다.
대신에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마치 대세와도 같이, 광범위하게 유행을 타고 있는 유형의 생활정치와 결합된 원내 중심주의는 정당정치에 아주 지독할 정도로, 시종일관 철두철미하게 부정적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부정적 영향의 전형적 사례를 작금의 손학규 실종 사태, 또는 행방불명 사건에서 여실하게 목격하고 있다.
손학규 씨에게 슬픈 소식은 묘연한 그의 행방이 확인되어도, 곧 그의 실종 사태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설사 마무리되어도 그는 여전히 투명인간 처지를 벗어나기가 불가능하다는 거다. 그한테 주어질 역할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원내 중심주의가 점점 강력하게 관철되는 상황에서 원외의 당대표가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미시적 생활정치가 맹위를 떨치는 풍토에서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는 제1야당 대표의 거칠고 맹렬한 사자후가 어떻게 여론에 먹혀들겠는가? 정당보다는 ‘진영’이 중요하다면서 소위 시민사회의 주관 아래 이당 저당 가리지 말고 “묻지 마 대통합”을 성사시켜야만 한다는데 정당의 우두머리가 무슨 자격으로 명함을 내밀겠는가?
정당도 필요 없고, 거대 담론도 필요 없고, 그저 국회 회의시간마다 꼬박꼬박 출석체크 잘하면서 정부가 내놓은 법률안 꼼꼼하게 심사하고, 역시 정부에서 제출한 예산안 잘 따져보는 정치인이 최고인 나라가 21세기 대한민국이다. 국가운영의 본질적 성격을 회계 법인이나 세무사 사무실에 위탁시키면 가장 제격일 연말정산 업무쯤으로 인식한 결과다.
“훌륭하고 이상적인 정치인=원내에 의석 가진 공인회계사”로 간주하는 한국정치의 현주소를 반기기는 좌파와 우파, 진보가 보수가 따로 없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경영자총협회와 삼성경제연구소, 참여연대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국민들에게 제시하는 유능하고 아름다운 정치인상은 그러므로 저 멀리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정치평론가가 지적한 대로 회계사형 정치인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카리스마 있는 정치인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푸념하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유권자들에게 허심탄회하게 묻고 싶어진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카리스마를 지닌 회계사를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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