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승려 엔닌[圓仁]은 장보고를 해신이라고 했다. 당나라에서 무령군 소장까지 활동했던 장보고가 돌아와 신라왕의 승인을 받고 청해진 대사로 임명받아 1만여명의 군사지원으로 설치한 청해진(완도)은 필자의 고향이기도 하다. 장보고는 고대 해양항로상 지나국과 일본과 한반도를 연결시켜 주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동아시아 무역을 장악하여 우리 민족사에서 해상왕 장보고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지나대륙에 환장한 어떤 엉터리 대륙사관자들은 이 청해진을 지나국의 동북공정논리를 도으면서 한국의 청해진을 지나국에게 조공하려고 안달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필자의 고향 완도와 장보고의 명예회복차원에서 청해진에 대해 알아 보기로 한다.
인동장씨대동보(仁同張氏大同普)나 장씨연원보감(張氏淵源寶鑑)에 의하면 "장보고의 아버지는 장백익(張伯翼)이고, 절강성 소흥사람으로 신라에 귀화한 사람이다. 장보고의 고손(高孫)에 해당하는 장정필은 고려 초기에 안동의 호족이 된다."라고 되어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권 제44 (열전 제4) "장보고·정년"편]에는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지금[고려] 완도(莞島)다.(淸海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 사료기록을 종합하면 장보고 아버지는 본래 당나라에게 상실한 백제담로지역인 절강성 소흥사람인데, 신라에 귀화한 사람이고 장보고가 태어나고 자란 지금의 완도가 청해진이라고 명백히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청해진과 관련한 고고학적 유적유물들은 완도에서 확실히 발견되고 출토됨으로써 명백히 완도가 장보고의 청해진이였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런데, 엉터리 대륙사관론자들은 고고학적 증거자료도 없이 문헌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이 청해진이 지금의 완도가 아니라 지나대륙의 산동지역이나 청해성으로 비정하며 지나국의 동북공정논리를 돕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완도읍 장좌리 장도 입구에는 동양에서 가장 큰 장보고 동상이 세워져 있다(우측은 장보고 영정)
어떤 장신나간 자들은 아래 지도자료처럼 바다도 아닌 청해성을 청해진이였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는데, 어떻게 바다도 아닌 저런 육지에서 해상무역을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이러한 주장은 헛소리라 할 것이다. 그리고 산동지역이 청해진이라는 주장을 하는 자들도 있으나, 산동지역은 장보고가 신라로 돌아 오기 전에 백제유민들과 활동했던 지역이며, 지나국과 일본을 이어 주는 중간 해상항로도 되지 못하기 때문에 청해진에 해당되지 않는다.
세계 고인돌무덤들의 원형이 되는 남방식 고인돌들이 세계 최다로 밀집된 서남해 지역은 영산강을 중심으로 고대부터 일찌기 해양활동이 활발하였다. 지나대륙과 한반도와 일본열도와 동남아를 연결시켜 준 한반도 해양세력이 바로 조선유민들의 한반도 유입으로 일본열도로 대거 이주한 <왜=해>세력이다. 그래서 지나문헌에는 지나대륙과 한반도.일본열도의 모든 해상세력을 <왜>로 총칭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 일본인들의 조상은 고고학적으로도 두골구도상 영산강지역 사람들이다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즉, 단군3조선 당시 마한(마조선)의 영역은 한반도와 일본열도다. 그래서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서남해 마한유물들이 큐수 등 일본열도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이다. 즉 단군3조선 당시에는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유기체적으로 하나의 문화공간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해상을 통하여 긴밀히 교류협력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리고 마한의 해상세력으로서 서남해 지역의 왜 세력은 한반도3한 시대까지 한반도서남부 해안지역에 존재하고 있었음(위만에게 나라를 강탈당한 기자조선세력이 바다를 건너 권력을 잡은 마한의 남쪽으로는 왜와 경계하고 있었다)이 [후한서][삼국지위지전]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백제는 왜세력의 도움으로 고구려와 전쟁을 하고 가야를 정벌하고 신라를 침략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광개토태왕비문에도 "왜는 백제의 보좌"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백제는 이러한 서남해 해상세력(왜=해)의 항해술과 선박제조술의 도움을 통하여 아시아 해상제국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고려의 왕건 또한 서남해 해상세력의 지지와 도움을 얻어 서남해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견훤의 후백제를 무너 뜨리고 후3국을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왕건의 두번째 왕후가 나주여인이고 고려 2대 황제가 나주여인으로부터 낳은 아들이다.
이러한 서남해 지역의 위상을 이해해야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와 완도에 청해진을 만든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신라가 지나대륙에서 개국했다는 주장은 엉터리 대륙사관론자들이 자유겠지만, [환단고기]어디에도 신라가 지나대륙에서 나라를 개국하여 지나세력이나 고구려.백제와 전쟁을 해서 영토를 차지했다는 기록은 없다. 있으면 제시해 보라. 단지, 천주(홍콩)지역에 신라지명들이 많아서 마치 신라가 천주지역에서 존재했던 것 처럼 주장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고구려 문자태왕이 당시 천주지역을 백제로부터 차지하고 신라인들을 대거 이주시켜 신라인들이 앞으로 거주할 수 있는 알맹이로 삼았다고 그 배경을 [환단고기-고구려 본기]에서 분명히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착각하지도 말고 오해없어야 한다.얼마든지 신라인들이 거주할 수 있고 신라인들이 이주하여 살 수 있으며 신라관련한 유적유물들을 남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장보고 시기는 이미 당나라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공멸시켜 버리고 당나라가 지나대륙을 차지하고 있던 시기다. 대동강이북의 고구려영토를 당나라에 넘기겠다고 김춘추가 당 태종에게 약조하고 당나라 군대의 지원을 받은 신라는 고구려.백제의 등살에서 벗어나지 못한 약소국으로 고구려.백제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신라의 꿈이였다. 그래서 퍼주기 조공을 하고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지역으로 끌어 들인 것이고 당나라에게 먹히기 전에 티벳지역의 토번이 장안까지 침략한 관계로 황급히 한반도에서 철군한 것이지 신라가 잘 싸워서가 아니다. 당나라는 이미 토사구팽시킨 신라를 먹고 신라까지 관리할 도호부를 설치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나당연합군과 백제가 지나대륙에서 전쟁했다는 엉터리 대륙사관론자들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를 가 보라!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에 소정방이가 빽빽이 친필로 [대당백제정벌비문]의 기록을 보라! 왜 백제를 정벌해는지 설명하고 당나라 왕을 칭송하는 아부글이 가득하다. 그리고 당나라 장수가 부여를 함락하고 공로를 기린 사적비도 있다. 그런데 무슨 헛소리들을 하는 것인가!
신라의 왕이 될 수도 있었으나 결국 신라권력에 암살당한 장보고는 누구인가?
아시아 해상제국을 건설한 백제유민의 아들 장보고의 본명은 궁복(弓福)·궁파(弓巴)이다.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장보고(長寶高)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예에 자질이 있어 일찌기 당나라로 건너가서주(徐州)의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 되었다. 당에서 신라로 귀국한 뒤 828년(흥덕왕 3) 왕에게 청해(淸海)를 진수(鎭守)할 것을 청했다. 당시 서남해안에서는 당나라의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략질하여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