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더위가 즐거운 오늘날 여름철
선진국과 어깨를 견줄만큼 첨단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이루어낸 지속적인 경제성장 덕분에 풍요로운 문명생활을 누리는 오늘날은 여름철 무더위가 더 이상 지긋지긋하지 않다. 지구촌 온난화의 영향으로 예전에 비해 여름철 더위가 말그대로 푹푹 찔만큼 기승을 부리지만 사무실이나 가정형편에 여유가 있는 집은 근무하거나 생활하는데 가장 적절한 섭씨 18도를 유지할 수 있는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고 최소한 시원한 바람을 쐬일 수 있는 선풍기 정도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시원한 강과 바다,산과 계곡으로 며칠씩 피서여행을 떠나는것도 생활화되어 있다. 목이 마를때는 냉장고에 넣어둔 시원한 음료수,냉수를 언제든 꺼내 마실 수 있고 냉장시킨 수박을 쪼개 먹으면 뱃속이 써름함을 느낄 정도로 시원하다. 더위를 이기는 간식도 다양하고 도처에 널려있다. 냉동 얼음과자인 아이스캔디와 우유를 섞어 각양각색으로 만든 아이스콘,아이스크림을 전문점이나 슈퍼에서 얼마든지 사먹을 수 있고 가족용으로 사다 냉장고 냉동실에 넣어두고 꺼내 먹는게 일반화되어 있다.
사이다,콜라,환타,이온음료,냉커피,우유까지 냉장시킨 각종 음료수 또한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게나 자판기에서 사서 목을 축일수 있다. 이처럼 여름철 무더위를 이기는 것을 넘어 즐길 수 있는 에어컨,선풍기등 가전제품,생활화된 피서문화,갈증을 달래면서 더위도 식히고 입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시원한 음료수와 빙과류가 넘쳐나는 오늘날 여름철은 무더위를 즐기는 무릉도원이 아닐 수 없다.
장작개비,고무신,보리쌀과 바꾸어 먹던 아이스케키
이처럼 경제적 풍요속에 여름 무더위가 즐거운 오늘날과 달리 냉장고는 물론 선풍기 한대없던 1970년대 이전 시골마을에서 삼복염천,무더운 여름을 나는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더위를 피한다는게 고작 바람이 송송 통하는 삼베바지에 고름을 풀어헤친 적삼차림으로 나무그늘 평상이나 멍석에 누워 부채를 부치거나 도랑이나 개천,방죽에서 멱을 감는 정도였다.
그나마 남자들은 우물가에 엎드려 바가지물로 등목을 할수도 있었으나 아낙네들은 밤이 되어야 끼리끼리 모여 도랑이나 개천으로 나가 반딧불을 벗삼아 몸을 씻는게 유일한 피서였다. 갈증을 달래는것도 우물이나 샘터에서 길러온 물을 바가지나,사발,대접으로 퍼마시는것 이상 다른게 없었다. "아이고 더워라,더워서 못 살겠네'소리를 입에 달고 살던 그시절 등장한게 빙수와 아이스케키였다.
빙수는 리어카에 얼음가는 기계를 싣고 다니면서 컵에 갈아 설탕을 뿌려 주거나 얼음박스로 냉장시킨 설탕물을 뽑아올려 컵으로 팔았는데 읍내나 관광지 주변에서 제한적으로 장사를 하였기 때문에 시골마을에서는 구경을 할 수 없었다.유일하게 도시,시골 가리지 않고 대중화되었던건 아이스케키였다.얼음과자로 부르기도 했던 아이스케키는 오늘날 처럼 전국적 규모의 대기업 식품회사가 우유,초콜릿,땅콩,각종 과일향료를 넣어 다양한 맛과 모양으로 만들어 낱개 포장한후 전국 구멍가게,슈퍼,전문점에 공급하여 파는것과 달리 중.소도시 마다 한두개씩 있던 아이스케키공장에서 소량 생산한것을 아이스케키 장수가 읍내와 시골마을을 돌아 다니며 팔았다.
당시 아이스케키는 맹물에다 팥을 삶아 찧어 만든 팥물과 달보드래한 맛이 나도록 사카린 또는 설탕을 섞어 틀에 넣고 손잡이용 막대기를 꽂아 얼려 만들었다. 생김새는 간혹 사각형으로 된것도 없지 않았으나 대부분 끝으로 갈수록 둥근 전봇대형으로 팥고물이 가라 앉은 탓에 붉은 팥색깔을 띠는 끝부분이 특이 맛이 좋았고 붉은 손잡이 부분으로 올수록 단맛이 덜하였다. 사카린이 적게 섞일 경우 그냥 얼음맛만 나는 것도 없지 않았다.
아이스케키통은 나무판자를 이용하여 사각형으로 짠다음 통 전체를 시원하고 깊은 물을 의미하는 파란색 페인트를 칠하였다.통 양옆에는 무지개처럼 타원형 흰글씨로 아이스케키,또는 얼음과자 글씨를 찍고 가운데는 한자로 얼음빙(氷)자를 둥근테를 넣어 새겼으며 하단에는 '평화당'등 아이스케키 생산공장 이름을 넣었다.
아이스케키통은 2중 구조였는데 아이스케키를 넣는 함석 사각통과 사이에 더위에 안에든 아이스케키가 녹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얼음을 넣었으며 케키통 하단 옆에 녹는 얼음물이 빠지도록 조그만 구멍이 나 있었다. 케키통은 두가지 형태로 메고 다니면서 팔 수 있도록 미군용 군용벨트를 잘라 만들어 붙인 멜빵끈이 달린 소형과 짐바리 자전거에 싣고 다니면서 팔 수 있는 대형통이었다.
아이스케키 장수가 시골마을에 다시 나타날수 있을까
소형통을 메고 다니는 아이스케키 장수가 시골마을에 오는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주로 읍내 가까운 마을이었고 대개 읍내를 돌아 다니며 팔았다. 읍내와 멀리 떨어진 시골마을은 대부분 아이스케키통을 짐바리 자전거에 실은 아이스케키 장수가 돌아 다녔다. 아이스케키 장수가 마을에 들어와 마을 골목을 돌며 "아이스 케키,얼음과자"를 외치며 한바퀴 돌면 마을은 야단법석이 났다.
아이스케키 사달라며 울며 보채는 아이들과 돈이 어디있느냐며 머리를 쥐어 박거나 엉덩이를 때리며 "썩을놈의 아이스케키 장사가 왜 들어와서 왜 내속을 썩혀, 심간 안편해 못살것네"하면서도 콧물,눈물 질질 흘리는 아이손을 잡고 한손에는 장작개비나 헌 고무신,또는 보릿쌀 한됫박을 들고 아이스케키 장수가 짐바리 자전거를 받쳐놓고 코흘리개 손님을 기다리는 정자나무 그늘로 서둘러 나온다.
아이스케키 장수 옆에는 아이들이 몰려나와 북적대고 어머니 할머니들은 십환짜리 동전을 1원으로 쳐주던 시절,고쟁이 옆에 매단 주머니를 꺼내 고이 아껴 두었던 동전 다섯개를 꺼내 오원짜리 아이스케키를 사서 입으로 한번 쓱 핥아본뒤 아이손에 들려준다.돈이 없으면빈병,헌고무신,구멍난 양은솥 또는 머리칼을 주고 아이스케키와 바꾸어 사주기도 하였다. 장작개비는 큰것으로 다섯개를 주어야 아이스케키 한개를 주었다.
아이스케키를 손에 든 아이들은 요즈음 아이들처럼 한입씩 베어 맛있게 양껏 먹는 것과 달리 빨리 먹는게 아까워 혀를 낼름 거리며 핥아먹거나 입에 넣어 한번씩 쪽 빨아먹는 식으로 아껴가며 먹었다. 아이스케키를 사먹지 못한 아이들은 아이스케키를 입에문 아이곁에 서서 부러움과 제발 한입만 주었으면 하는 애원어린 눈빛으로 쳐다 보며 따라 다녔다.
이때 혀로 핥고 입에 넣었다 뺏다 하며 약만 올리는 아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한번씩 빨아 볼 수 있도록 건네주며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돈이 귀했던 가난한 보릿고개 시절 장작개비,헌고무신,깨진 쟁기보습,빵구난 양은솥,쇠붙이,머리칼,보리쌀과 바꾸어 먹던 아이스케키는 시골마을 어린이들이 무더운 여름을 넘기는 유일한 간식이었다.
요즈음 보릿고개 시절 추억과 향수를 지극하는 아이스케키 장수 150여명이 서울거리를 활보하며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산업화와 함께 사라진 아이스케키 장수가 시골마을에 다시 등장하기는 어려울것 같다. 아이스케키를 사먹을 아이들도 없지만 남아있는 노인들도 시원한 냉장고 음료수,차디찬 숭늉,선풍기로 여름을 나는데 부족함이 없어 굳이 아이스케키를 먹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