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방송국 사극중에서 MBC의 <선덕여왕>이 단연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시청자들의 호응이 많아지자, 연말까지 연장방송을 한다고 한다. MBC는 일찌기 '주몽'을 통하여 고고리(고구려) 시조가 되는 고추모를 한참 할아버지뻘 되는 해모수 아들로 둔갑시키고 번조선 영역에 속하는 요서지역에 존재해야 할 소위'한4군'을 요동지역으로 설정하는 등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것이 마치 역사의 진실인양 세뇌시키는 역사를 왜곡시켰다. 고추모의 아버지는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진의 손자로서 옥저제후였던 불리지라고 [한단고기]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이번 MBC[선덕여왕]을 통하여 우려되는 점 또한 시청자들로 하여금 신라.김춘추.김유신에 대한 호감도를 높임으로써 김춘추.김유신의 숭당사대조공외교노선이 민족사적으로 얼마나 비참한 역사를 만들고 말았는지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망각하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 줄기세포사태 당시 방송과 관련한 MBC PD수첩 제작진의 사과문
세계 최초로 체세포 줄기세포 원천기술을 개발한 황우석박사에 대해 진실규명이 부재한 차원에서 타격을 가함으로써 미국의 국익에 부합된 방송행위를 자행했으며, 고대사와 관련한 사극 또한 소설드라마처럼 제작방영하고 있는 꼴이니 스스로 진실을 밝히고 약자들을 대변하는 방송이라기보다는 상업주의에 찌든 방송사임을 자임하는 반증이라 본다.
이러한 MBC의 역사왜곡차원의 고대사 관련 사극 [선덕여왕]과 관련하여 신라가 주는 민족사적 교훈에 대한 고찰차원에서 사대조공외교노선이 후손들에게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런 민족사를 만든지를 조명해 보기로 한다.
▲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영정
신라 김춘추의 사대조공외교노선과 고구려.백제의 멸망
신라는 654년 진덕여왕이 자식이 없이 죽자,귀족회의에서 추대된 상대등 알천(閼川)과 상의하여 김춘추를 왕으로 세웠다. 그가 신라 최고의 외교관으로 불리우는 태종 무열왕이다. 그러나, 한반도과 만주.중국지역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패권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완전한 자주독립을 갈구하던 신라는 드디어 죽어서 왕의 자리에 까지 추앙받은 김유신과 파트너가 된 김춘추 시대에 이르러 당나라에 대한 사대조공외교노선을 통하여 당나라와 손을 잡고 한반도지역에서 고구려.백제를 완전히 멸망시켜버림으로써 만주.중국.동남아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를 당나라에게 양도하고 대동강 이남에 만족하는 영역을 확보함으로써 신라자신으로서는 김춘추의 아들 문무왕이 비문에 자신들의 혈통이 흉노족 김일제 후손임을 당당하게 밝히며 김씨 최초의 신라왕 미추왕을 신라의 태조로 선언하면서 이제 숨쉬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고 자기만족을 표명한 것이다. 그것이 소위, 신라사관이 자랑스러워하는 '통일신라'라는 역사왜곡의 용어인 것이다. 3국 통일이라고 했을 때는 고구려와 백제의 모든 영역을 통합했을 때를 의미한다. 신라가 만주.중국.동남아 지역에 이르는 고구려.백제의 광활한 영역은 제외하고서라도 최소한 만주지역이라도 회복했던가?
▲ 신라는 당나라에 넘겨줘 버린 고구려.백제의 광활한 영역을 통합하지 못하고 대동강 이남에 만족해야 했기에 신라의 '3국 통일'이란 용어는 역사를 왜곡하는 용어로써 이미 폐기된지 오래 되었다. 3국 통일이라는 용어보다는 '3국 공멸'이라는 용어가 적합하다.
신라는 고작 한반도 대동강 이남에 만족하는 영역를 확보했고, 만주지역은 고려성을 지키던 고구려 장군 대중상이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후고구려가 개국되고 아들 대조영에 이르러 대진국으로 국호가 바뀌게 됨으로써 결국 대진국과 신라가 전선을 대치하는 '남북조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를 멸망시켜버린 신라에 대해서 좋게 지낼리 없는 대진국은 적대관계를 유지했고, 백제멸망이후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일본'이란 국호로 다시 태어난 일본과는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이 때 일본에 보낸 대진국의 외교문서에는 '고려'로 표기함으로써 대진국이 대외적으로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명확히 했다.
북한에서는 통일신라론을 배격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통일신라로 용인하면 신라 김춘추와 당나라 고종과의 상호 협약(한반도 대동강이남만 신라영토로 인정. 나머지는 당나라에 귀속) 북한지역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 주장을 인정하는 셈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김상일 전 한신대 교수는 이명박정부의 친일숭미사대조공외교노선을 비판하는 글에서 "법흥왕 이후 115년간 사용돼 오던 연호를 당의 것으로 바꾸고 옷도 당의 것을 착복하기 시작한다. 복종, 복속, 항복 등 모두가 옷에 관계 되는 말이고 보면 옷을 바꾼다는 것은 굴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김춘추는 당나라를 찬양하는 사대주의의 극치인 오행시 ‘태평송’을 지어 바친다. 태평송의 내용은 당나라 황제의 위업을 훼손하는 고구려를 ‘오랑캐’라 지칭하며 단 칼에 쳐 물리쳐 달라는 내용이다. 651년 김춘추는 모든 제도를 당나라의 것으로 바꾸고 지명도 순 우리말에서 한자로 바꾸는 동시에 유교를 적극 도입하여 국학이란 교육기관을 세운다. 성균관의 전신과 같은 것이다. 유생들이여 이런 역사를 알고 있는가?
드디어 당 고종은 소정방을 최고 지휘관으로 하여 10만 대군을 이끌고 660년 백제를 향한 대 공격을 단행한다. 김유신은 신바람 났으며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내가 지금 죽기를 서슴치 않고 험난한 판에 달려 온 것은 큰 나라(당)의 힘을 빌려 두 나라를 없애 버리는 데 있다”(삼국사기 42권 김유신열전)라고 의기를 토하고 있다.
625년 당태종이 즉위할 무렵 신라는 김유신과 김춘추가 모든 실권을 한 손에 거머쥐고 있을 때이다. 김춘추는 진평왕의 외손으로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의하면 김춘추는 나이 60이 되었는데도 중국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백제와 고구려를 칠 것을 요구했는데 그 모양이 측은하기 그지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는 임금을 당나라 황실 친척으로 바꾸라는 요구까지 수용하면서 당의 군대 파병을 간청한다.그러자 당은 두 가지 조건을 내 건다. 고구려를 칠 경우는 요동지방을 당에 내 주고 백제를 칠 경우에는 신라의 임금을 당나라 황제의 친척으로 바꾸고 동시에 당나라 군대의 신라 파견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647년 김춘추는 직접 당태종을 찾아가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까지 치도록 애걸한다. 이에 둘 사이에 비밀 협정이 이루어져 평양 이남 백제 땅은 신라가 그 나머지 모든 땅은 당이 차지한다는 밀약이 이루어졌다..이러한 김춘추와 김유신을 두고 현대 한국의 학자들은 천추에 남을 명 외교관 그리고 충신으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에 찬양을 하고 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는 속담이 있기는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