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하물며 너는 평민의 천한 것으로 태어났고, 농민으로 일어나서 불을 지르고 겁탈하는 것을 좋은 계책이라 여기며, 살상(殺傷)하는 것을 급한 임무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는 큰 죄만 있고, 속죄될 조그마한 착함도 없었으니, 천하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아마도 땅 가운데 귀신까지 이미 너를 베어 죽이려고 의론하리라!
설령 숨이 붙어있다 해도 혼(魂)은 이미 나갔고, 벌써 정신이 죽고 넋이 빠졌으리라.대저 사람의 일이란 제 스스로 아는 것 만한 것이 없다. 내가 헛말을 하는 것이 아니니, 너는 모름지기 살펴 들으라.
縱饒假氣遊魂。早合亡神奪魄。凡爲人事。莫若自知。吾不妄言。汝須審聽。
이어지는 문장은, 황소(黃巢)가 침상에 누워 읽다가 놀라서 굴러 떨어졌다는 다소 미신적인 설화(說話)의 대상이 되는 바로 그 대목입니다.
먼저 최치원은 황소(黃巢)의 신분이 ‘여염지말(閭閻之末)’, 즉 소금장사를 하였으므로 평민 가운데서도 가장 천하고, ‘농묘지간(隴畝之間)’, 즉 논두렁(隴)과 밭이랑(畝)사이에서 농사를 짓던 신분임을 다시 환기시킵니다. 여기서, ‘여염(閭閻)’이란 단어는 오늘날에도 쓰이는 단어로서,본래의 의미는 ‘여(閭)’는 ‘마을의 문(里門)’이고, ‘염(閻)’은 ‘마을의 중문(里中門)’을 나타내어서, 평민이 살던 곳, 즉 ‘평민’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천한 신분출신이, ‘분겁(焚劫: 집을 불태우고 재산을 빼앗는 일)’을 좋은 계책이라 여기며(以焚劫爲良謀), 함부로 ‘살상(殺傷)’하는 일을 최우선 임무로 생각하고(以殺傷爲急務), ‘대연(大愆: 큰 죄)’이 ‘탁발(擢髮: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뽑는다는 말로 지극히 많음을 의미)’처럼 많으며(有大愆可以擢髮), ‘속신(贖身)’, 즉 속죄할 조그만 착함도 없었다(無小善可以贖身)라고 황소(黃巢)의 그간의 행적을 논죄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속신(贖身)’이란 단어중 ‘속(贖)’의 의미는 ‘몸값을 받고 노비의 신분을 풀어 주어서 양민이 되게 하던 일’을 뜻하는데, 오늘날까지 ‘속량(贖良)’, ‘대속(代贖)’등 기독교에서도 흔히 사용되는 단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천한 신분에 온갖 나쁜 짓만 일삼으니,‘천하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不唯天下之人皆思顯戮)’, ‘아마도 땅 가운데 귀신까지 이미 너를 베어 죽이려고 의론하리라!(抑亦地中之鬼已議陰誅)’라고 질타합니다.황소(黃巢)가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대목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이 문장중 ‘불유(不唯)’는 ‘비단 ~그 뿐만이 아니라’란 의미의 부사이며, ‘억역(抑亦)’이란 단어 또한 추측을 나타내는 부사어로서, ‘혹시, 아마도, 혹은’등으로 해석합니다. ‘현륙(顯戮)’이란 단어는 ‘죄인을 죽여서 그 시체를 여러 사람에게 보이던 일’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縱饒假氣遊魂(종요가기유혼)’입니다.먼저, ‘종요(縱饒)’란 단어는 ‘설령~할지라도’란 뜻의 부사어인데, ‘종령(縱令)’,또는 ‘가령(假令)’, ‘가사(假使)’등과 같이 쓰이는 단어입니다.그 다음 ‘가기유혼(假氣遊魂)’이란 표현인데, 문장은 위(魏) 명제(明帝) 조예(曹叡: 위나라(魏)의 초대 황제인 세조(世祖) 조비(曹丕)의 장남이며, 위나라의 제2대 황제)의 <선재행(善哉行)>이란 시에서 처음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
備則亡虜。(아무리 전쟁을) 준비하여도 도망다니는 포로의 신세가 되니, 假氣遊魂。숨이 붙어있다 해도 혼(魂)은 이미 나갔고, 魚鳥為伍。물고기와 새만이 뒤를 따르며, 虎臣列將。산짐승만이 호위하는 신세가 된즉, 怫鬱充怒。분노가 가득하여 가슴이 터질 것 같다네.
따라서, ‘황소(黃巢), 너는 설령 숨이 붙어있다 해도 혼(魂)은 이미 나갔고(縱饒假氣遊魂)’,또한 ‘벌써 정신이 죽고 넋이 빠진 것과 같다(合) (早合亡神奪魄)’, 즉 이미 죽은 목숨과 진배없다는 무시무시한 표현으로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문장, ‘범위인사(凡爲人事) 막약자지(莫若自知)’,즉 ‘대저 사람의 일이란 제 스스로 아는 것 만한 것이 없다.’란 표현은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59장, ‘치인사천(治人事天) 막약색(莫若嗇)’,즉 ‘백성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김에는 아끼는 것 만한 것이 없다’란 구절을 원용한 표현법입니다.
마지막으로, 최치원은 ‘내가 헛말을 하는 것이 아니니,너는 모름지기 살펴 들으라(吾不妄言 汝須審聽)’라고 이 문단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 국가에서 덕이 깊어 더러운 것도 참아주고, 은혜가 중하여 결점을 따지지 아니하여, 너에게 벼슬을 주고, 또한 너에게 지방 병권(兵權)을 주었거늘 너는 오히려 짐새[鴆]와 같은 독심만을 품고, 올빼미의 소리를 거두지 아니하여, 움직이면 사람을 물어뜯고, 하는 짓이 개(犬)가 주인에게 짖는 듯하여, 필경에는 몸이 임금의 덕화를 등지고, 군사가 궁궐에까지 몰려들어, 공후(公侯)들은 달아나거나 숨어서 위험한 여정을 겪게 되고, 황제의 행차는 먼 지방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 문장에서는, 당나라 조정이 황소(黃巢)의 세력이 강해짐에 따라 그에게 벼슬을 주어 회유하려 했다는 사실이 나타납니다.
첫문장은 ‘근자(近者)’란 의미와 같은 ‘비자(比者)’란 단어로 시작합니다.이 ‘비(比)’란 글자가 ‘근래’란 의미로 사용되는 용례는 <진서(陳書)>나 <여씨춘추(吕氏春秋)>에 나타나고 있는데,사소한 단어 하나하나도 주의깊게 골라 사용하므로서 문장의 격을 높이려는 최치원의 노력이 엿보입니다.
이어서, ‘당나라 조정이 덕이 깊어(德深), 더러운 것도 참아주고(含垢),은혜가 중하여(恩重), 결점을 따지지 않아서(棄瑕), 벼슬을 주고(授爾節旄), 지방의 병권을 맡겼다(寄爾方鎭)’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여기서 사용된, ‘함구(含垢)’란 단어는 요즘도 흔히 쓰이는 ‘함구(緘口)’란 단어와 우리말 발음은 같으나 의미는 다른 단어인데, ‘더러운 때(垢) 같은 허물도 참고 포용한다’란 의미의 단어로,<좌전(左傳). 선공15년(宣公十五年)>에 나오는 단어를 용전(用典)한 것이며, 또 ‘기하(棄瑕)’란 단어는 ‘허물(瑕)을 물리치다’란 의미의 <구당서(舊唐書).문원집(文苑傳)>상의 표현을 전고(典故)한 것입니다.
‘절모(節旄)’란, 천자가 임명의 표적으로서 출정하는 장군이나 사절(使節)에게 주던 기(旗)를 의미하며, ‘방진(方鎭)’은 당나라때 주(州)의 상급기관으로 군사상 중요지역에 설치한 행정구역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이러한 당나라 왕실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황소(黃巢),너는 ‘짐독(鴆毒)’같은 독심을 품고, ‘올빼미 소리(梟聲)’를 거두지 않아, 움직이면 사람을 물어뜯고(動則齧人),하는 짓이 개(犬)가 주인에게 짖는 듯하다(行唯吠主)”라고 하여, 황소(黃巢)를 견자(犬子)에 비유하는 최대의 모욕적 언사를 구사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짐독(鴆毒)’의 ‘짐(鴆)’은 중국에 살고 있는 독조(毒鳥)를 말하는데,그 깃으로 술을 담그면 독주(毒酒)가 되어 마시면 죽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어지는 ‘올빼미의 소리를 거두지 아니한다(不斂梟聲)’란 표현은, ‘왜 하필 올빼미 소리인가?’라는 의문이 들수 있는데,바로 다음의 고사를 인용한 것입니다.
<안자춘추(晏子春秋)>에 의하면,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노침대(露寢臺)란 궁궐을 짓고도 출입하지 않았다 합니다